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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4 네팔여행기 ⑩
  2. 2009.05.05 네팔여행기 ⑨
  3. 2009.05.04 네팔여행기 ⑧
  4. 2009.05.04 네팔여행기 ⑦
  5. 2009.05.01 네팔여행기 ⑥
  6. 2009.05.01 네팔여행기 ⑤
  7. 2009.05.01 네팔여행기 ④
  8. 2009.05.01 네팔여행기 ③
  9. 2009.05.01 네팔여행기 ②
  10. 2009.05.01 네팔여행기 ①

네팔여행기 ⑩



산 속에서의 링반데룽을 경험한 어제의 혹독한 체험으로 체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걸음을 지체하거나 쉬고 있을 여력은 없었다.
아침 일찍 Tatopani(타토파니)에서 눈을 떠 보니, Yenina와 Niraj일행은 아침 산책을 나가고 없었다.
나와 Vivek은 일단 여유롭게 식사를 했다.
네팔 방문 이후 가장 호화롭던 식단이었다.


<↑초호화 식단??>



<타토파니 마을 전경>


<우리가 지난밤 뛰어들었던 강>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치도록 Yenina일행이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아, 우리는 먼저 길을 떠나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곤 했기에 걷다보면 또 어디선가 만나게 될 거라고 Vivek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대치 않은 상태에서 늘 마주치던 Yenina일행은 우리가 그렇게 예상한 그 시점부터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달까.
우연은 우리가 기대를 품게 되는 그 순간에 싫증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게 아닐런지.

아무튼 그 날 우리는 Beni를 거쳐 결국 포카라에 가기까지 다시 무수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히말라야 산 속의 학교>


<야외수업중???>

 


<길에서 마주친 검은소>


<자유롭게 산 속을 활보하는 소 떼>


<역시 험난하던 하산길>


 Beni에 도착해 드디어 힘들던 히말라야 트래킹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포카라까지 트럭을 타고 가야했는데, 푼 힐Poon Hill에서의 심한 추위로 독감에 걸린 나는 몸 상태가 매우 안좋았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아래에서도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트럭을 기다리며 앉아있자니 속속 하산하는 일행들이 눈에 띄었는데, 아쉽게도 익숙한 얼굴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우리는 좁은 트럭의 뒤에 올랐다. 사람들을 꾹꾹 눌러 태운 트럭은 매우 비좁았다.
어마어마한 흙길을 달리는데 정말 먼지가 마치 소독차 달리듯 뿌옇게 피어올라서 나는 계속 마른 기침을 쏟아내야 했다.
눈도 너무 따가웠고, 목도 아팠다.

여차저차하여 간신히 포카라 도착!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입 안 먼지가 가득한 느낌이라 침을 바닥에 뱉었는데, 놀라울만큼 까만 색이었다.
몸 깊숙이까지 먼지가 한가득 들어간 느낌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나는 거의 기진맥진하여 먼지 뒤집어쓴 몸을 씻을 생각도 못한채, 옷이나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한채,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뻗어 일어나지 못했다.
하루종일 몸을 쉬어야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몸 상태가 안좋았다.

그러나 Vivek은 호텔 주인과 알 수 없는 대화를 하며 뭔가 분주한 느낌으로 왔다갔다 했다.
조금 심각한 얼굴이라 내심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참 후, 방으로 들어온 Vivek이 매우 안쓰러운 얼굴로 상황을 설명해주었는데, 정말 절망적이었다.

내일부터 포카라의 버스업체가 모두 파업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 파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며, 따라서 잘하면 한동안 카트만두에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게 아닌가.
아찔했다.
예정된 출국 일정에 꼭 출국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Vivek의 이야기를 듣고 기가 질렸다.
Vivek의 말에 의하면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은 바로 오늘! 그것도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것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가는데 그 밤중에 다시 여정이 시작되다니...!!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미 카트만두까지 가는 직통버스는 모두 끊겨버렸고,
우리는 뭉링 Mungling이라는 지역까지 포카라 버스를 타고 오늘 당장 가서 그곳에서 다시 카트만두행 버스를
갈아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파업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행객들 모두 비상이 걸린 상태라 뭉링까지 가는 버스마저도 구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한시라도 빨리 버스정류장에 가보는게 상책이었다.

더 이상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위기 상황에서는 없던 힘이 솟아나는지
나는 다시 베낭을 매고, 발걸음을 떼었다.

버스 정류장은 어마어마한 상태였다.
파업 준비중인 버스 기사들과 시민들의 시끄러운 항의가 혼재되어 너무나 어지러운 모습.
게다가 Vivek 역시 너무 초조한 상태라 넋이 나간 나를 그 혼란 한가운데 버려두고 혼자 이리저리
표를 구하러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머릿 속에 아무생각이 안들고 그저 멍했다.

Vivek이 표를 구하러 동분서주한지 한 두 시간여가 지났을까.
간신히 버스의 표를 구해온 히어로 Vivek!
우리는 매우 좁은 버스에 몸을 싣었다.
짐칸을 따로 마련해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자기 몸집만한 배낭을 무릎위에 얹은 상태로 이동해야 했다.
버스 안은 좌석 뿐 아니라 통로, 계단할 것 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가뜩이나 다리가 짧은 나마저도 무릎이 앞좌석에 꽉 차게 닿아 아플정도로 좌석이 좁은 상태에다
위에 베낭을 안고, 초과인원을 훨씬 넘은 사람들이 탄 버스는 마치 전쟁포로들의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느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초호화식단으로 식사를 한 후, 종일 굶은 상태였는데다
감기 몸살은 점점 몸을 파고들어 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Mungling을 향해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 것은 밤 9시.
기절에 가까운 상태로 버스를 타고 있다기보다 버스에 실린듯한 느낌으로 정신은 혼미해졌다.
한 대여섯시간을 달렸을까.
드디어 버스가 Mungling에 섰다.
새벽 두세시쯤 된 어정쩡한 시간.
앞으로 카트만두행 새벽 버스가 올 때까지 길 한가운데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내 몸 상태가 이미 한계에 이르러있는 것을 알아챈 Vivek은 또다시 동분서주하며 쉴 곳을 찾으려 노력했다.
간신히 낡은 호텔을 찾았는데, 정말 놀라울만큼 지저분하고 낡고 위험해보였다.
야쿠자같이 생긴 주인은 연신 하품을 하며 뭐라뭐라 말했는데, 돈을 더 줄테니 음식을 준비해달라는 Vivek의 요구에
달 바트 타카리라는 네팔 전통음식을 준비해주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입맛에 잘 맞아 늘상 좋아하던 달 바트 타카리가 너무 맛이 없었다.
위생 상태도 안좋은듯 했다.
먹는둥마는둥 하고 내 방에 들어갔는데, 방의 상태는 정말 눕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문을 잘 잠그고 난 뒤 옷을 벗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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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⑨



새벽 4시에 일어나 Poon Hill에 오르기로 약속했건만, 5시가 다 되도록 Vivek은 일어나는 기색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간단히 다이어리 정리도 했다.
5시가 넘어서자 사람들이 차차 Poon Hill을 향해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초조함을 견딜 수 없어
직접 나가 Vivek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부지런히 먼저 일어나 문을 두드렸던 Vivek은 정작 가장 중요한 날엔 늦잠을 자고 말았다.

5시반부터 시작된 우리의 강행군.

한국에서 준비해간 손전등은 우리가 막 롯지 문을 나서자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버렸다.
우리는 스틱도, 눈 길을 걸을만한 등산화도, 불빛도 없이 어두컴컴한 눈길을 걸어야 했다.
좁고 어둡고 미끄러운 눈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지 정말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칠흙같은 어둠 속을 그저 긴 불빛의 행렬을 따라 끝없이 걸을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빛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꼭대기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

어느새 구름이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바로 이 곳이 Poon Hill of Mt. Himalaya였다.
꼭대기에는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옹기조기 모여 대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고,
우리의 뒤에도 부지런히 올라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산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재밌게도 우리는 그 곳에서 우리가 산을 오르며 지나쳤던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Nick과 중국인 일행들, 유럽인들, 그리고 두 친구 중 Nepali guy인 Niraj 등등..
함께 사진을 찍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빛의 베일은 벌써 세상을 덮었는데도 모체인 태양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우리는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일출을 기다려야 했다.
해발 3000m의 추위는 뼛속 깊이 파고들어 나는 벌벌 떨며 파랗게 질려버렸다.
한 쪽에서 장사꾼이 엄청 비싼 값에 hot tea를 팔고 있었는데, Vivek은 불쌍한 나를 위해 tea를 사주었다.
얼마 가지 않았지만 작은 온기가 얼마나 소중하던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짙은 오렌지빛의 태양이 드디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을 호박색으로 덮더니, 오랜 기다림이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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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짧은 시간안에 오렌지빛은 투명한 가시광선으로 변하였다.
장엄한 풍경은 파도에 씻긴듯 사라지고 다시 일상적인 풍경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아쉬웠지만 입이 돌아갈만큼 어마어마한 추위에 우리는 다시 지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사실상 베이스 캠프가 있는 해발 5000m까지 올라가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Vivek은 동의하지 않았고, 나 역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3210m의 PoonHill이 반환점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미끄러운 길을 내려가 Ulleri(울레리)에 도착했다.
PoonHill에서 만난 Niraj와 함께 하산하기로 결정했기에 우리는 짐을 챙겨 Niraj와 Yenina가 있는 롯지로
이동했다. 불쌍한 Yenina는 지난 몇 일간의 트레킹으로 몸져 누워있었다.

올라온 길은 Naya Pul에서 시작했지만, 우리는 다른 경로를 통해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지는 Totapani(토타파니)! Pani는 네팔어로 '물'이란 뜻이고 'Tota'는 '뜨겁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Totapani'는 '온천이 있는 곳 = 핫샤워가 가능한 곳'이었다.
네팔에 온 후 단 한번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지 못해 지쳐있는 나를 위해 Vivek이 경로를 그쪽으로 잡은 것이다.


아침부터 멋진 일출을 보았기에 우리는 꽤 들떠있었다.
Yenina도 약을 먹고 회복이 된건지 우리 넷은 계속 떠들면서 산을 내려갔다.
눈으로 덮인 산을 하산하는 것은 등산보다 몇 배 더 힘들었다.
나는 공항에서 걸렸던 아이젠을 꺼내 신발에 장착했다.
뜻밖에도 기대 이상의 효과로 나는 전혀 미끄러지지 않으며 내려갈 수 있었다.
아이젠의 뾰족한 끝이 두텁게 쌓인 눈 위에 푹푹 박혀 쉽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은 아이젠이 없는데다, Yenina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정말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내려갔다.




↑ 내려가는 길에 발견한 귀여운 눈사람♡


 

↑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좋은 Yenina와 Niraj
(Niraj는 스틱이 없어 나뭇가지를 뾰족하게 갈아 스틱 만드는 중)

 


↑ 우리가 택한 하산길은 아직 정부와 마오이스트의 경계지역이라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러자 Yenina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선 어설픈 남자 Niraj.
찍다가 너무 웃겨서 쓰러질 뻔....
Niraj보다는 Yenina가 더 든든해보인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꽝꽝 두껍게 얼어있는 눈들은 점차 녹아 사라지고,
마른 땅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계절인데도 고도에 따라 이렇게까지 차이나는 기온이 무척 신기했다.
따스한 기운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 고도가 낮아질수록 변화하는 풍경들


 
↑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는 히말라야의 가족들


 
↑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하던 네팔 어린이 ^^


 
↑ 마오이스트의 흔적.
슬픈 내전이 아직은 완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참을 내려가다보니 어느새 Niraj와 Yenina는 보이지 않았다.
걸음의 속도가 달랐던 까닭이다.
나와 Vivek은 내려갈 때도 엄청난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중간 중간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게 되는데, 돌로 만든 계단을 지나 마을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두운 집 안에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한 네팔 아저씨가 나를 불러세우는 것이 아닌가.

"Are you Korean?"

이제껏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네팔에서 한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챈 사람이
한 번도 없었기에 신기한 마음이 들어 "Yes"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한국인을 좋아한다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나와 Vivek은 얼결에 집 안으로 안내받았다.

안내된 의자에 앉자마자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나와 나를 에워쌌다.
아저씨는 서랍을 마구 뒤지더니 앨범을 하나 꺼내들었다.

알고보니 아저씨의 남동생이 한국에 일을 하러 갔다가 그 곳 공장장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아저씨는 남동생의 사진, 그리고 제수가 되는 한국 여자분의 사진을 보여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나 많이 펴 보고, 만지고 했는지 앨범 속 사진은 닳고 닳아 있었다.

한국으로 간 후 남동생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간간히 전해주는 소식에 의하면 한국에서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했다면서
다 한국 사람들 덕분이라고 했다.

그 집안 식구들이 친척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 내 마음 역시 뭉클해졌다.

나는 차를 대접받기도 하고,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그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저마다 서로 나에게 영어로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 남이 얘기하든 말든 동시에 여러 사람이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 특히 놀랐던 것은 전혀 정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 집 큰 아들의 그림 솜씨였다.
그냥 집에서 펜으로 그렸다는 그의 그림을 보고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정말 놀라운 재능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설명했다.





↑ 정말 깜짝 놀란 그림 실력
일본 사람이 준 펜으로 그려서 일장기와 네팔기가 그려져있다.
아마도 '하이테크' 인듯...



 
↑ 아저씨네 가족들과 함께...
큰 아들은 사진을 찍든말든 그림 설명에 여념이 없었다.


너무 따뜻한 대접을 받은데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아서 정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 집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나는 가족들과 손을 흔들고 헤어져야 했다.
큰 아들의 재능에 감동한 내가 도와줄 게 없냐고 묻자 큰 아들은 일본펜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에 가서 그 펜을 사서 보내주려고 했는데, 그 때 그 큰 아들이 적어 준 주소를 받은 Vivek은
나 몰래 그것을 없애고 말았다.
Ram의 경우도 그렇고, Vivek은 네팔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거나 친해지려 하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Vivek의 자존심인걸까?
어쨌든 약속했으면서도 펜을 보내주지 못해 나는 여행 후에도 계속 마음이 아팠다.
이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아저씨네 집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점점 해가 땅을 향해 여정을 돌리고 있었다.
Totapani까지는 아직도 길이 멀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Totapani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힘을 내어 힘차게 걸었다.
한 시간 정도 걸은 후 다시 다른 분에게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또 다시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의아해하며 다시 힘차게 걸었다.
한 시간 후 또 다른 분께 여쭤보았을 때도 또 한 시간을 이야기하셨다.
우리는 점점 지치고 힘들어졌다.
어떤 장소에서 묻든 Totapani까지는 계속 한 시간 거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Totapani는 나오지 않았다.







↑ 꼭대기는 한 겨울같이 추운데,
마치 화창한 봄날같은 산허리의 풍경


 
↑ 뛰어난 장사수완으로 귤을 팔던 예쁜 여자아이
나중에 뒤따라오던 Niraj 일행 역시 귤을 샀다고 했다.
귤은 정말 맛있긴 했다.



걸어도, 걸어도, 걸어도, 아무리 걸어도 Totapani는 나오지 않았고,
도무지 얼마나 남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Vivek은 계속 지나는 사람들한테 물었으나 모두의 대답은 똑같았다. '한 시간'
우리가 그렇게 헤매는 동안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다.
산 속에서 해가 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내려간다 싶더니 순식간에 어둠의 실루엣이 골짜기에 자리잡았고,
곧 깜깜한 어둠이 우리를 뒤덮었다.

어느새 트레킹 코스에서도 벗어나 우리는 험한 계곡의 어딘가에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 평탄하게 길이 난 트레킹 코스와 달리 우리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깎아지른듯한 절벽을 내려가며 헤매야 했다.
점점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손전등마저 고장난데다 달도 뜨지 않아서 정말 나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을만큼 어두웠다.
나는 어딘가에 계속 부딪히며 넘어졌다.
다리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무서움이 너무나 컸다.
한참을 걸은 후에 우리는 우리가 아까 맨 처음 출발했던 곳에 다시 왔음을 깨달았다.
머리털이 쭈삣 설만큼 공포스러웠다.

갑자기 그동안 그렇게 의지해왔던 Vivek마저도 의심스러웠다.
'일부러 나를 이런 이상한 길로 데려온 것이 아닐까?'
정말 한심하게도 그런 생각마저 들어서 나는 공포와 의심과 두려움으로 온 몸이 고슴도치처럼
예민하게 곤두섰다.
Vivek 역시 공포에 차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나라에 있는데다가 남자였으므로 애써
두려움을 숨기고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기절 직전인 나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계속 걸었다.

그렇게 두 시간 이상을 어두운 산 속에서 헤매자 나는 온몸의 통증에 무감각해졌고,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났다.
그저 Vivek이 끄는대로 질질 끌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어둠 속의 산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먼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있는 힘껏 불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로 Totapani였다.
Totapani와 우리 사이에는 강이 있었는데, 우리는 몸이 물에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 속으로 뛰어들어 건넜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Vivek이 세게 나를 잡아준 데다 다행히
수심도 내 키를 넘어서진 않아서 Totapani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Totapani는 너무 평화롭고 예쁜 작은 마을이었는데,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편한 차림으로 거리를 구경하거나 시원한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그 거리 한가운데를 우리는 물에 흠뻑 젖고 공포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통과해 걸었다.

Vivek은 거리를 돌다 적당해 보이는 숙소에 들어갔다.
나를 위해 hot shower가 가능한 곳을 찾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곳에 산 속에서 헤어져버린 Yenina를 만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에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Yenina와 Niraj는
여유있게 Totapani에 도착해 쉬고 있었다.
그 많은 숙소들 중에 또 우연찮게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된 것이 너무 신기해 우리는 마구 웃었다.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을만큼 힘들었지만,
핫샤워를 할 수 있다는 주인의 말에 나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여 옥상으로 올라가 샤워를 했다.
네팔에 온 후 처음 온 몸으로 느끼는 온기였다.
수도장치가 매우 불편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따뜻한 물에 씻고나니 매우 노곤하여 나는 Vivek에게 인사할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내 방으로 골인하여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정말 어마어마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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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⑧



2007/2/19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긴밤을 지새웠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새벽에 내 방 창으로 내다 본 장면

 

밤새 떠들고 놀던 외국인 일행은 지치지도 않는지 새벽부터 또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떠들었다.
있으나마나한 벽 너머로 아주 작은 소리까지도 세심하게 다 들려왔다.
나는 화장실 앞에 있는 굉장히 지저분하고 조그마한 세면대에서 겨우겨우 세수를 했다. 아래층에 내려가니 롯지의
주인인 가족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와 Vivek은 토스트와 네팔차를 주문하였다. 따끈한 차가 들어가니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집 큰아들은 불평도 없이 손님들 방과 부엌을 오가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했다.
이제 겨우 10살 정도 됐으려나..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우리는 좀 서둘러 출발하였다. 오늘 안에 정상까지 올라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 울레리(Ulleri)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또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바로 Niraj와 Yenina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한시간이나 먼저 출발해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어제의 근육통으로 끙끙거리는데다가
앞뒤로 맨 짐의 무게로 거의 넘어질듯 하자 Niraj는 내가 앞에 매단 가방을 거의 빼앗듯이 하여 Vivek에게 넘겼다.
그는 막 농담식으로 옆에 건장한 일꾼이 있는데 뭐하러 내가 짐을 다 지냐고, 내 짐을 다 지우고 나까지 올라타도
Vivek은 거뜬할 거라면서 웃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Vivek도 내가 너무 불쌍했는지 그 가방을 자기가 들겠다고 했다.
Niraj는 나에게 주변의 남자를 잘 활용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자 거의 자기 키만한 짐을 짊어지고 가던 Yenina가
Niraj를 째려보았다. 그 눈빛을 눈치챈 Niraj는 자기는 Vivek과 달리 연약한 남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 제법 높은 곳까지 올라온건지 군데군데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본 Vivek은 매우 흥분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나 사진으로 눈을 본 적은 있지만
직접 경험하는 건 처음이라며 만져 보기도 하고, 사진을 막 찍기도 했다.
Vivek의 고향은 네팔의 아래쪽인 우림지역이라서 눈을 볼 기회가 없고, 수도인 카트만두도 춥긴 하지만 결코 0도 이하로
떨어지진 않기 때문에 눈을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 눈을 보고 흥분한 Vivek, 곧바로 뛰어들다!


 

↑ 우스갯소리의 대가 Niraj

 

↑ 열심히 눈을 치우던 꼬마에게 한 수 가르치려 들던 Niraj
그러나 연약한 남자였기에 결과는 참패.. ㅋㅋ

 

 몇 시간 정도나 올라갔을까. 어제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어제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짐 하나를 Vivek에게 맡기고도 중간중간 계속 쉬어야만 했다. 다행히 Yenina와 Niraj도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서로 속도를 맞추며 같이 올라갔다. 중간에 만난 간이매점은 정말 너무나 반가웠다.
그 곳에서 네팔차를 주문해 마시며 추운 속을 달래고,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 휴식중..
지금에서야 깨달았는데 사진 찍을 때마다 Niraj는 카메라를
혼자 의식하고 있다...

  

모두가 지쳐서 쉬고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좀 기운이 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특히 매점 아주머니의 딸이 혼자 바닥에 눕혀져 있었는데 보는 순간 너무나 귀여워서 마음을 빼앗겼다.
손을 잡고 흔들어보기도 하고, 한국식으로 얼러보기도 했다. 아이의 귀에는 철사같은 것이 걸려있었다.
갓난아기인데 이미 귀를 뚫은 것이었다. 내가 좀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하니 Vivek은 당연한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특히 Vivek이 속한 체트리와 브라만같이 윗쪽 카스트의 여자들은 코까지 뚫어야 한다고 한다. 코걸이가 그 신분을 나타내는 셈이다.
그런데 Vivek의 누나는 아기때 뚫지 않았기 때문에 다 커서 뚫어야 했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일 때 뚫는 쪽이 더 낫다는 설명이었다.

내가 아기랑 노는 동안 어떤 네팔 할아버지가 빠른 속도로 도착하셨다. 나와 아기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우리쪽으로 와서
나에게 뭐라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는 외국인이라 네팔어를 알아들을 수 없음을 애써 표현하였지만,
그 할아버지는 내 말은 듣는둥 마는둥 하며 계속 따다다다 네팔어로 이야기했다.


 

↑ 매점 아주머니의 아기

  

트레킹을 하는 내내 나는 정말 질릴만큼 Ass를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산길에서 Ass를 만났을 때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길의 양 사이드 중에 벼랑 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Ass가 피해있는 사람을 엉덩이로 툭 치는데 그 힘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몇 m정도는 밀려갈 정도로 힘이 세다. 따라서 자칫하면 엉덩이에 떠밀려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말보다 훨씬 작고 눈이 순해보여서 왠지 여린 동물처럼 느껴졌는데 정말 힘은 생각보다 장사였다.

 

↑ 어마어마한 무게를 짊어지고 산을 올라야 하는 Ass
 

 Ass는 네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동물이다. 경사지고 미끄러운 히말라야 산을 오를 수 있는 동물이
몇 안되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오르다가는 좁은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거기다 몸집은 노새만하지만 힘은 그보다 훨씬 세니 너무나 필요한 동물이다.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나르며 산을 오르는 Ass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계속 Ass의 사진을 찍었더니
Vivek은 내가 너무 Ass만 좋아한다고 하며 막 웃겼다.

 

 

↑ 사진이 작아서 잘 안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부부 두 명이
이마에 이상한 끈을 대고 거기에 의지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마침 Ass 일행이 또 지나가자 Vivek은 나보고 Ass와 같이 사진 찍으라고 제안하였다.
좋다고 금방 대답했지만 막상 Ass가 가까이 다가오니 너무 무서워서 저절로 몸이 엉거주춤해졌다.

 

↑ Ass가 무서워서 어정쩡히 서 있는 나
네팔 청년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

 

↑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네팔 가족들


 

↑ 미끌미끌, 조심조심

 

 히말라야 산 곳곳에는 트레킹 온 사람들을 위한 롯지가 마련되어 있다. 이 롯지는 정말 방문객들에게 단비같은 존재이다.
잠잘 곳은 물론, 화장실, 먹을 것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옛날로 치면 산 속의 주막이려나?
그러나 모든 롯지가 항상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주인을 잃고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는 롯지도 있었다.
어제 지나친 돌격행진으로 힘들었었기 때문에 오늘의 트레킹은 여유가 있고, 자주 쉬었다.
이런 방치된 롯지도 우리의 쉼터로 이용되곤 했다.

 

↑ 눈밭에서 마냥 행복한 Vivek
강아지가 따로 없다.

 

↑ 나와 Yenina

 

↑ 폐가는 우리의 놀이터?!

 

 

우리의 목적지인 푼힐로 가는 가장 난코스는 어제 지났던 계단길이었다. 그 길을 지났기에 오늘의 산행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목적지인 고라파니에 도착하였다. 아쉽게도 그 전에 서로 걷는 속력이 좀 달라져 우리는 Yenina, Niraj일행과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산에 있는 한 또 오늘, 혹은 내일이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점심 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롯지로 들어갔다. 고라파니는 생각보다 큰 마을이라서 롯지도 참 많고,
그 안에 시설도 꽤 좋았다. 우리가 들어간 롯지 안에서는 영국인 배낭여행객 3명이 사이좋게 포커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Hi~'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Hi~'
그들은 우리에게 무언가 더 물었다. "!!@#$!@$%@^'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

 

우리의 교육은 주로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일까?
딱딱 끊어지는 영국식 영어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네팔에선 영국식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Vivek은
좀 더 편하게 이야기했다. 주로 나와 Vivek의 관계에 대해 물었는데 내가 우린 무려 6년 이상된 펜팔이라고 이야기하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더욱이 우리가 나야풀에서 이 곳 고라파니까지 한나절 반만에 올라왔다는 소리를 듣고 더욱 놀라워했다.
그 일행은 무려3일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러고도 힘들어서 오늘 하루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이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난로에 젖은 신발을 말리고 불을 쬐며 밥을 기다렸다.
그 때 마침 Vivek이 무언가를 들고 나에게 왔다.
책들이었다. 이 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이후에 올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고 간 책들이었다.
일본 그림책, 미국책 등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책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의 맨 앞페이지에는 그 책을 남기고 간 사람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그런 글을 발견하니 웬지 찡한 기분이 들었다.

 

 

↑ 난로에 발을 말리며..

 

 

↑ 식사를 기다리며...

 

 

네팔에서는 식사를 주문하고 시간이 꽤나 지나야 음식이 나온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동안 마침 네팔의 국민 게임인 그 게임을 해 보았다. 역시나 게임의 소질이 없는 나는 백전백패였다.

 

점심으로 역시나 달 바트 타카리를 먹고, 우리는 다시 푼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밥을 든든히 먹고 난로에 몸을 녹이니 이제 얼마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내가 싫었던걸까?
갑자기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우리는 길을 헷갈리고 말았다.
갈림길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Vivek은 근처의 롯지에 들어가 길을 물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숙소를 잡아야겠다고 했다.
아직 고라파니를 벗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게다가 날도 저물기 전인데 오늘의 트레킹을 끝내야겠다고 하니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꼭대기인 푼힐에는 숙소가 없기 때문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꼼짝 없이 산 속에서
얼어죽는다고 했다. 고라파니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새벽에 일찍 출발해 푼힐에서 이른 아침 해 뜨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라고 했다.

나와 Vivek은 준비 부족을 실감하며 숙소를 잡았다. Vivek은 여러 개의 롯지중에 나보고 숙소를 고르라고 했는데,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었던 나는 대충 건물의 형태를 보고 좀 깨끗해 보이는 곳을 지적했다.
왠지 핫 샤워가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오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 날 머문 롯지는 내가 머물렀던 롯지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이미 유럽인 단체 관광객이 온 롯지를 장악하고 있는데다가, 결국 저녁에는 전기마저 나가서 먹먹한 어둠 속에 갇혀야 했다.
게다가 고도 2080m인 그 곳은 정말 엄청나게 추웠다. 핫샤워는 커녕 물이 나오지도 않고, 세면대도 없었다.

 

 

↑ 저무는 햇빛에 의지해 론리플래닛을 읽는 나

 

↑ 눈 속에 파묻혀버린 롯지


 

 방에 들어가있으면 거의 얼어죽을 지경이라서 어쩔 수 없이 홀로 나와있어야 했는데, 그 홀은 정체모를 유럽인 관광객들로
너무나 시끄럽고 부산했다. 그들은 스무명 가까이 되었는데 가이드와 포터는 물론, 요리사까지 고용해서 굉장히 대규모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도 아닌 다른 언어였으므로 나는 정체모를 언어로 끊임없이 떠드는 그들이 좀 두려웠다.

두려움과 추위.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나의 경우에는 추위였기 때문에 나는 그 부산함과 어색함, 두려움 속에서도 계속 홀의 난로곁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Vivek과 나는 거의 계단을 기어서 3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초라고는 10cm정도의 몽당초를 딸랑 하나 주었을 뿐이므로 나와 Vivek은 한 방에 모여있어야 했다.
너무 추웠기 때문에 Vivek의 방에서 초를 가운데 켜놓고 이불을 뒤집어 쓴 다음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확실히 횟수로 7년의 인연은 예사 인연은 아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방은 춥다 춥다 이렇게 추울 순 없다 싶을만큼 너무나 추웠다.
다른 방과 달리 건물의 맨끝에 위치한 그 곳은 방의 네 벽중 두 개가 커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의아하게 여겼던 내가 커튼을 훽 젖혔더니 세상에! 벽이 없었다. 벽 전체가 얇디얇은 유리였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너무 웃겨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Vivek도 그 상황에서 우스꽝스럽게 절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웃겼다.
그 이후에도 여행이 힘들 때면 Vivek은 나에게 고라파니에서의 자기 방을 떠올리라고 하며 웃음을 주었다.

 

좀 불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방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
불쌍한 Vivek을 얼음방에 남겨둔 채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 곳에는 씻을 수 있는 시설이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열심히 지고 올라온 Vivek에게는 미안하지만,
생수를 조금 덜어서 그걸로 씻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곧 잠에 빠졌다.
너무 추웠지만, 이미 피로가 극도로 쌓여 있었으므로 바로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푼힐로 출발해야만 했다.

 

 

고도 2080m의 추위 속에서 나는 어떤 꿈을 꾸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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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⑦



 

2007/2/18

 

 

  추위로 밤새 잠을 설치다 결국 또 이른 새벽에 잠이 깼다.

드디어 히말라야에 오르는 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산에 오를 짐을 모두 챙긴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입산허가서를 받으러 갔다.
여기에서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마음 먹은 Vivek은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전부 자기가 하려 애썼다.
직접 줄 서서 허가를 받고, 필요한 양식도 자기가 전부 작성했다.
나는 중간에 끼어서 내가 할 것임을 이야기했지만, Vivek은 말을 듣지 않았다.
혼자 여행은커녕 가이드보다도 더 착실하게 내 역할을 대신 하는 Vivek이 때로 고맙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에는 확실히 썩 기분좋지 않았다.
게다가 산에 들어가는 허가증 발급료로 무려 2000Rs나 내야 했다. (약 3만원)
우리나라에서의 입산료라고 해도 비싼 편인데 네팔의 물가가 우리보다 훨씬 낮은 걸 감안하면 상당한 바가지라는 것을
수 있다. 이 이후에도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운 입장료니 관광료가 줄줄이 이어졌다.

  Vivek 은 이어 아무런 설명 없이 트레킹 장비 대여점이라던가, 기타 필요한 곳을 끌고 다녀서
나는 상당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행 막바지 무렵 Vivek도 먼저 사과를 했다.)
결국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한 후, 우리는 큰 길가의 가게에서 토스트와 네팔차로 아침식사를 했다.
택시로 이제 히말라야의 입구를 향해 출발하는가 싶더니 Vivek은 또 잠시 시장에서 멈추었다.
상당히 만발의 준비를 하는듯 싶었다. Vivek은 택시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혼자 남겨진 나는
결국 택시에서 내려 마음대로 시장을 돌아다녔다.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한 과일 노점상의 아이들을 발견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학교에 가기 전이었다. 네팔의 학교는 오전 10~11시쯤에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귀여워 보여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Hi~" 한 명의 남자아이는 도망가 버리고 단아하게 교복을 입은 남매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중 오빠인 쪽이 'Hi~"하고 인사를 했다.
너무나 귀여워서 사진을 좀 찍어도 괜찮냐고 하니까 흔쾌히 "Yes" 라고 대답해 주었다.

 

↑ 너무 귀엽던 두 남매

 

나의 물음에는 주로 오빠쪽이 답했다.
나이나 무얼하고 있는가 등을 물어봤는데,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여자아이쪽은 영어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지 똑같은 질문에도 답이 계속 달라지는 등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가 어떤 말을 하던 계속 배시시 웃어주어 너무나 기쁜 마음이 들었다.
둘 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정말 너무 예뻤다.
네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좀 더 눈이 크고 짙으며, 코는 높은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목구비가 가장 밋밋한 것은 한.중.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시장에서 장을 다 본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나야풀(Naya Pul)로 출발했다.
바로 그 곳이 우리가 예정한 코스의 입산장소였다.
그곳은 포카라에서도 그다지 가깝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무려 2시간이나 더 가야했다.

산이 가까워지자 관리소가 나왔다.
어떤 아주머니가 관리소에서 허가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연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는 'So cute'라고 반복해 말해주었다. 외국인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Naya Pul 도착.

등산장비를 챙겨 택시에서 내렸다. 입구에는 시바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Vivek이 사제를 찾아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게 도와주었다.
 

↑ 시바신의 사원. 사원 안쪽에 시바 가족의 그림이 걸려 있다.

 

산으로 들어서는 입구인 다리를 건너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마을이 나왔기 때문에 줄곧 평지를 걸었다. 그런데 평지 위에서도 짐이 너무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었다.
앞뒤로 맨 짐때문에 나는 이리 뒤뚱 저리 뒤뚱 하며 간신히 걸었다. 마을은 도로같은 것이 전부 큰 돌로 정비되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되어 나는 나귀(Ass)를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Horse'라고 야단법석을 떨었건만,
Vivek은 저건 절대 horse가 아니고 그냥 Ass라며 무덤덤했다.

 


↑ 처음으로 만났던 Ass.
이 이후 지겹도록 많은 Ass들과 마주치게 된다.

 

마을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남아 있었는데, 주로 게임같은걸 하며 놀고 있었다.
게임이라고 해서 한국의 아이들이 하는 컴퓨터 게임같은 것이 아니라 손으로 치는 당구같은 것이었다.
Vivek은 네팔의 국민게임이라고 가르쳐줬다. 우리나라에서의 고스톱과 비슷한 대중성을 지닌듯 했다.

 

↑ 게임을 즐기는 네팔 아이들


 

우리는 곧 마을을 지나 트레킹 코스에 접어들었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어 사방은 고요했고,
이따금씩 물소리나 바람 소리만 귀에 스칠 뿐이었다. 우리는 말도 없이 묵묵히 걸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5도 안팎의 쌀쌀한 날씨에 추위를 느꼈었는데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땀이 났다.
나는 네 겹이나 껴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야 했다.

 

 

↑ 트레킹 코스

  

 
 
 
 

↑ 장작을 패는 아저씨

 

산에 오르며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내려오는 사람들, 혹은 우리와 같이 오르는 사람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두 손을 합장하고 '나마스떼 Namaste'라고 인사했다.

나와 Vivek은 걸음이 상당히 빠른 타입이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제쳤다.
둘 다 무분별하게 돌진한 다음 길게 쉬는 타입이었다. 이 때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을 우리가 꼭대기에 오르는 3일 동안
내내 만나게 된다. 특히 그 중에서 우리와 같이 여자, 남자 둘이 오르고 있는 팀을 자주 만났는데 그 팀은 우리와는 성향이
달랐다. 우리가 마구 돌진해 오른다음 오래오래 쉬고 있는 반면, 그 팀은 매우 천천히 걷고 거의 쉬지 않았다.
덕분에 서로 사이좋게 반복해 지나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인사에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더욱이 팀의 구성원이 비슷하다는 점도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주로 외국인+네팔인의 구성은 관광객+포터(짐을 지는 사람)의 케이스가 많다.
그런데 오로지 그 팀만 유일하게 Vivek과 나처럼 친구끼리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여자쪽은 Yenina라는 이름으로
핀란드 사람이었고, 남자는 Niraj라는 이름의 네팔인이었다.

 

따가운 햇볕과 끊임없이 계속되는 오르막길로 거의 녹초가 될 무렵 작은 식당이 하나 나타났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산에 오르는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보았던 Yenina와 Niraj였다. Niraj가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바로 옆테이블에 앉았다.
Niraj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31살 남자로 상당히 박학다식하였다.
Vivek의 말로는 네팔의 여러 카스트들 중에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카스트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 카스트들 중에는 많은 비율이
부자라고 했다. Niraj도 집안도 꽤 부유한 편인지 그의 이력은 상당했다. 네팔에서 교육은 마친 후, 독일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그 후 중국에서도 4년간 유학했다. 직물을 전공했는데, 현재는 중국 내에서 직물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그는 네팔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아 얘기 도중 지나가는 독일 사람, 미국 혹은 영국인,
네팔 사람, 중국 사람에게 제각기 말을 건넸다. 더구나 중국에 오래 살았던 탓인지 중국과 가까운 한국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많아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간단한 한국말도 할 줄 아는데다 김치나 기타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현재 한국인들이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중국 젊은이들이 한국의 연예인을 상당히 좋아하며
한국의 여자들을 미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여자들처럼 예뻐지고 싶은 많은 중국 여자들이 한국 화장품을 산다고 이야기했다.
한류라는건 언론에서 부풀린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인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네팔과 Niraj의 네팔어 대화가 오래 계속되자 지겨워진 나는 식당 근처의 샘물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들에게 물을 뿌리고 장난을 치며 좀 놀았다. 아이들이 하는 말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왁자지껄한 것은
한국 아이들이나 네팔 아이들이나 똑같았다.

 


 

식당에서는 네팔의 계단식 밭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는데, 산지에는 주로 계단식 논밭을 이용한다고 배웠던 먼 옛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밭 위에는 소똥이 군데군데 놓여있었는데, 아마 거름으로 쓰려는 것 같았다.

 

↑ 계단식 밭

 

 

음식은 주문한 지 30분이 넘어서야 겨우 나왔다. 우리나라 같으면 가게에 항의하고 난리가 났겠지만,
네팔 사람들은 시간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듯 모두 여유로웠다. 네팔의 음식 달 바트 타카리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트레킹에 나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산길이 아니라 돌계단으로 코스가 바뀌어 있었다.
산길에 비해 걷기 편했기 때문에 나는 잘됐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이 돌길의 끝에 우리의 목적지인 울레리(Ulleri)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생각보다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잠깐 정도야 오를 수 있겠지만 몇 시간 내내 계단만 오르고 있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중간 중간 자주 쉬어야만 했다.

 

↑ 난간에 매달려 휴식을 취하는 Vivek

 





↑ 잠시 휴식중...


 

끊임없는 계단을 오르는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친구끼리 네팔에 온 두 중국인, 영국 단체 관광객, 고산병으로 거의 쓰러질 것 같던 중국 여대생(Vivek이 더 이상 올라가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Yenina와 Niraj 등. 모두 포터를 고용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도 Vivek만 없었더라면 포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도 어린 내가 네팔의 나이 많은 아저씨를 포터로 쓰는 모습을 Vivek이 보면 기분 나쁠 것 같아 짐을 모두 내가 지고
올랐다. 그러나 점점 죽을 지경이었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턱턱 막혔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휴식의 주기가 빨라졌다.
앞뒤로 하나씩 맨 가방이 점점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사진을 찍는 Vivek(左)과 중국인 일행들(右)
그리고 혼자 계속 앞서가던 영국 소년(中, 다리 위)

 


계속 마주치면서 중국인 일행단과도 친해졌다. 그 중에서 계속 뒤쳐지던 남자와 좀 친해졌다.
그는 Vivek을 나의 포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Vivek도 설명하기 귀찮아졌는지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는 내가 혼자 네팔을 찾은 것에 감탄하고, 또 성큼성큼 산을 오르는 체력에도 감탄했다. 계속 나에게 'A Strong girl'을
연발했다. 딱히 등산 준비를 해 오지 않은 나는 동네에서 신던 운동화를 신고 대강대강 산을 오른 반면, 그는 만반의 등산준비를
해 온 상태였다. 그런데도 내가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산을 오르자 계속 감탄을 했다. 그는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나중에
Vivek은 그가 나에게 말을 거는 내내 상당히 shy해 보였다며 계속 놀렸다. 그는 나에게 등산 스틱을 주고 싶어했지만,
왠지 번거로울 것 같아 거절했다. 중간 쉬는 시간에 우리는 서로 싸 온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그와 대화하는 게 상당히 편하게 느껴져 나는 그를 기다리주며 걸었지만,
그가 점점 지쳐가자 어쩔 수 없이 먼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기 직전 그는 자신의 이름과 메일 주소를 가르쳐주며
연락하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Nick이었다.

 

 

↑ 풀을 뜯고 있던 산양들.
바위틈 구석을 '메에'하고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풀을 뜯었다.


 

Nick과 헤어진 후 Vivek과 나는 더욱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왠지 조금만 더 가면 Ulleri에 도착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계속 분발하려 애썼다.
그러나 몇 시간을 가도가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계단은 정말 절망스러웠다. 처음에는 즐겁게 오르던 나도, 중간쯤에는
힘들지만 분발하던 나도 모두 사라지고 거의 의식 없이 습관처럼 다리를 들었다 내려놓는 나만 남게 되었다.
거의 6시간이 넘게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더 이상 계단을 오른다는 느낌이 없었다.
다리는 자동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내려가는 것은 중력에 의해 쉽게 가능하지만 다리를 위로 올리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더욱이 짐은 어깨를 너무 짓눌러 어깨가 곧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바지에는 발톱이 마구 흔들려 곧 빠질 것 같았다.
발끝이 아프고, 운동화에 긁힌 발목에서는 피가 났다. 등산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땀이 많이 나고 열도 많이 나서 머리도 굉장히 어지러웠다.

 


 

 나는 Vivek에게 이 곳을 'The everlasting stair'이라고 부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여자들은 작은 핸드백 같은 것만 들고 가볍게 산을 오르는 영국인 일행을 볼 때면 '나도 Vivek만 아니었다면 저렇게
산을 오를 수 있는건데...' 하는 어리석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들은 여러 명의 포터와 가이드를 고용해 매우 편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등산장비도 완벽한데다 양산을 쓸 여유까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듯 힘들어서 엉뚱한 곳에 화살을 날렸던 것 같다.

 

 

한참 힘이 빠지고, 정신이 없을 무렵 돌계단 입구에서 작은 여자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나에게 두 손을 모아 'Namaste'라고 인사를 하더니 왠 크고 붉은 꽃을 주며 'Welcome'이라고 말했다.
Vivek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네팔의 국화였다. 갑자기 힘들던 마음이 싸악 가시면서 너무 기뻤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가방을 온통 헤집어 사탕을 찾아냈다. 답례로 사탕을 주자 아이가 방긋 웃었다.

 

 

↑ 아이가 준 네팔의 빨간 국화(國花)를 들고...

 

갑자기 Vivek은 나에게 꽃을 머리에 꽂을 것을 요구했다.
빨간꽃을 머리에 꽂으라니....
나는 Vivek에게 한국에서 머리에 꽃을 꽂는건 crazy girl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Vivek은 크게 놀라며 네팔에서는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고백할 때 머리에 꽃을 꽂아준다고 했다.
어째서 아름다운 꽃을 꽂는 것이 미친 사람의 행위냐고 의아해했다.
딱히 설명할 방도가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튼 Vivek의 끈질긴 요구로 머리에 꽂긴 했으나, 지금 내가 봐도 역시 광년이로 보이니 사진은 생략.

습관화된 문화란 상당히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잠시 느꼈다.

  

↑ 산 꼭대기에 홀로 서 있던 집.

"대체 정체가 뭐냐!"
아기를 재우는 요람이 천정에 매달려있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초가집)과 상당히 유사했다.


 

한참을 오르던 중 우리는 산사태의 현장과 마주하게 되었다.
Vivek은 히말라야는 산사태가 잦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신기한 것은 무너진 흙 사이에 삼지창이 하나 꽂혀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Vivek은 바로 시바신의 무기라고 이야기했다.
산사태를 시바신의 벌이라고 여기는 네팔인은 산사태가 난 곳에 시바신의 무기를 꽂아두어 다시는 산사태가 그 곳을 찾지 않게
해 달라는 바람을 표시한다고 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었는데 너무 오래 되어 세밀하게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 산사태의 흔적


↑ 시바신의 삼지창

 

 시간은 어느덧 늦어지고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건만 아직도 Ulleri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끝날듯 끝날듯 보이는 계단도 역시나 그 이름마냥 끝없이 이어졌다.
이 구비를 돌면 끝이 나오겠거니, 저 구비를 돌면 끝이 나오겠거니..
마냥 허망한 기대를 하며 힘을 내보지만, 돌아오는건 새로운 계단의 행렬 뿐이었다. 거의 막바지 무렵에는 너무 힘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 못할만큼 너무 힘들었다. 내 다리 하나 천근처럼 느껴진다는
그 말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천근이란 이런 무게구나.' 싶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발은 피투성이, 어깨는 짓무르고 완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Vivek은 나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청난 속도로 계속 산을 올랐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갔다. 우리가 이제까지 만났던 일행들은 모두 뒤쳐져 버렸다.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우리를 따라온 것은 일행 중 가장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영국인 소년 뿐이었다.
오로지 그 소년만이 우리와 비슷한 속력으로 산을 올랐다.
그는 주근깨가 얼굴에 나고, 얼굴이 말처럼 길죽했는데 나와 Vivek이 신기했는지 끊임없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Vivek은 내가 너무 지쳐 대화가 불가능해지자 심심했는지 그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둘은 대화를 하며 올라가고, 나는 내가 살아있는걸까 하는 물음에 홀로 답하며 계속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아픔도, 의식도 모두 초월한 기분.

마치 신선이 된듯 초탈한 기분이 든 바로 그 때!

Ulleri가 눈에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산을 오른지 약 10시간이 될 무렵이었다. 나는 거의 10 시간 가까이 계단만 오른 것이었다.
(물론 약간 뻥. 처음엔 약간 평지도 있었고, 점심도 한 시간 넘게 먹었다.)

 

Vivek은 조건좋은 롯지(Lodge)를 고르려 했으나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으므로 아무데나 상관없었다.
우리는 가까운 롯지에 드디어 짐을 풀었다. 온몸이 쓰리고 아팠다.
근육통이 장난 아니었다. 이대로 일주일간 어찌 트레킹을 할런지 눈앞이 캄캄했다.

 

1인실이 모두 찼으므로 우리 모두 각각 2인실을 잡았다. 2인실임에도 불구하고 1박에 천원밖에 안할 정도로 매우 쌌다.
이 정도 물가의 네팔에서 입산 허가증을 얼마나 비싸게 팔았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방은 거의 나무와 다름없이 딱딱한 침대 두 개와 어설픈 그림 하나, 그리고 커텐이 달려있었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이 날 머문 이 롯지가 내가 트레킹 하는 내내 묵었던 그 어떤 롯지중에 가장 호화스럽고 좋은 롯지였다.

 

↑ 정말 낡고 보잘것 없는 곳이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보니 그럴듯해 보여 억울하다!

 

창은 굉장히 얇디얇은 유리 한 겹이었는데 그나마도 창틀과 아귀가 맞지 않아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정도의 틈이 있었다. 더욱이 당연하게도 이 방 이외에 부대시설은 거의 없었다.
샤워시설은 커녕 굉장히 지저분하고 어둡고 좁은 세면대가 하나 화장실 앞 복도에 있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이 이후의 롯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대강 짐을 풀고 쓰러져 눕고 싶었으나 Vivek은 아직도 기운이 나는지 내 방으로 놀러왔다. 그는 9시가 넘을 때까지 혼자 수다를
떨었다. 나는 너무 지쳐 거의 듣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의 수다가 너무 재밌어서 계속 웃었다. 주로 네팔의 다양한 카스트에 대한
이야기었는데, 너무나 다양한 문화를 가진 카스트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움직이기 귀찮았던 우리는 양파 수프를 방으로
주문해 같이 저녁으로 먹었다.

 
9시가 넘자 Vivek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바로 내 옆방이었는데 굉장히 얇은 벽 사이로 돌아간 지 5분도 안되어 Vivek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몹시 피곤한 것과는 달리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온몸은 녹초이고 분명히 잠이 필요한데도 잠이 오지 않아 밤새 괴로워했다.
게다가 밤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추위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자다말고 내가 가진 모든 옷을 전부 꺼내 껴입었지만 그래도 추위를 이겨낼 수 없었다.

 

히말라야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처절한 추위와 함께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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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카라 호수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스투파(Stupa)에 가기 위해 포카라 호수를 건너야만 했다.
Vivek이 뱃사공들과 흥정하는 동안 난 호수 주변을 돌며 포카라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머금었다.

따사로운 햇볕, 반짝이는 잔디, 푸른 하늘과 여유로운 소들의 걸음.
아마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네팔에서 내가 마음의 여유를 찾기 시작했던 것은..
긴장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었다.

 
  흥정을 끝낸 Vivek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뱃사공 아저씨가 손수 노를 젓는 완전 수동식 나룻배를 탔다.
덜덜거리는 모터 소리 없이 아름다운 풍경 안에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Vivek과 나도 별다른 대화 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 평화로운 포카라 호수 한가운데에서
 


  내가 사진 한 컷을 찍어도 되냐고 뱃사공 아저씨에게 말하자,
아저씨는 흔쾌히 "Yes"라고 대답하셨다.
아저씨는 네팔의 남자용 전통모자를 쓰고 계셨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않고 슥슥 젓는 것 같은데 배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건너편 땅에 도착하자 아저씨는 먼저 풀쩍 뛰어내려 물 속을 첨벙첨벙 걸어 배를 땅 근처로 끌어올려
젖지 않고 배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Vivek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스투파를 모두 보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고 한다. 왕복 요금을 모두 치뤘다는 이야기였다. 

  나와 Vivek은 스투파에 가기 위해 약간의 등산을 해야 했다. 스투파가 산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구비, 한 구비 돌 때마다 포카라 호수가 저만큼 멀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작아지는 모습이 신기해서 나는 자꾸만 사진을 찍었다.

  

↑ 산에 오르다 잠시 쉬며 찍은 포카라 전경


↑ 저만큼 뒷걸음친 포카라.
산 위에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 보여
나는 왠지 모를 놀라움에 젖었다.

 

   30분 이상 산을 올랐을까? 어느덧 정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맨 처음 보인 것은 시원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야자수였다.
네팔은 지금 한겨울인데, 산꼭대기에는 야자수가 자라고 있었다.

 

 


 

   휴일이라 가족끼리 나들이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의 모습이 신기한지 자꾸만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굽이를 더 돌자, 드디어 커다란 스투파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 처음으로 만난 거대한 스투파
 

 

  스투파는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하고 있는 네팔에서 불교 쪽의 유물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종의 탑 정도일까?
하지만 그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온통 하얗게 칠해진 스투파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나는 좀 흥분했다.
같은 '불교'의 유물임에도 이렇듯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스투파에 마음대로 올라갈 수는 있지만, 신을 신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맨 아래에 신을 벗어놓고 맨발로 스투파를 올랐다.
꼭대기에는 방위마다 다양한 부처의 상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바람에 펄럭이는 원색 깃발은 불교를 상징한다.
깃발 위에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문이 적혀있다고 한다.

  

 
 
 


  

  스투파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햇볕을 쬐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Vivek도 사진을 찍고 혹은 얘기를 하며 스투파 주변을 빙빙 돌다가 내려왔다.
주변의 매점 비슷한 노점에 가서 음료를 샀는데, 노점 주인이 나에게 기념품도 사기를 권유했다.
팔찌며 목걸이같은 것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아 그냥 가려 하자, 주인이 일본어로 뭐라뭐라 했다. 내가 일본인인줄 알았나보다.
내가 웃으며 "I'm not Japanese"라고 말하자, 그는 이번에는 "Are you from China?"라고 물었다.
내가 "No"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한국인임을 알아차렸다.
Vivek이 이 곳에 한국인이 자주 오냐고 물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스투파 주변에 일본어로 기념문이 세워져있었다.
짧은 한자실력으로 읽어보니, 일본이 유물 복구 및 보존에 많은 부분을 기여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어느새 늦은 오후의 해가 기울고 있었다.

 

 

↑ 나

↑ Vivek

 

↑ 내려가던 길 위의 돌담집.

↑ 일직선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있던 문.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쉽게 지나갈 수 없다는 의미인걸까?

 

↑ 길을 가로막고 서 있던 깜장 소.

 

 

  우리가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자 사공 아저씨는 다시 배를 끌어냈다.
산 꼭대기의 스투파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안에 놀라울만큼 긍정적인 에너지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평화롭지만, 조금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졌던 온 세상이 이제는 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아까는 아름다운 풍경과 구경자 정도의 역할이었는데, 이제는 나 역시 풍경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침묵 속에 호수를 건너던 아까와는 달리 Vivek과 나는 재밌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장난을 쳤다.
Vivek이 사공 아저씨에게 노를 저어보겠다며 바닥에 놓여 있던 여분의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보고도 한 번 저어보라 했다. 나도 노를 받아 열심히 저어보았는데,
사공 아저씨가 몇 번의 몸짓으로 쓱쓱 쉽게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너무나 어려웠다. 노도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어설픈 나의 몸짓에 사공 아저씨가 잇몸을 드러내며 허허 웃었다.


 

↑ 열심히 노를 젓는 Vivek


↑ 고요한 호수 위를 끝없이 퍼져나가는 파장

 

  호수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었는데, 그 섬 전체도 사원이라 하였다. 
불교스투파로 가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힌두 사원이라니!

Vivek은 사공 아저씨게 부탁하여 잠시 섬에 들를 수 있도록 해줬다.
힌두 사원은 불교 사원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 섬 위의 이름모를 힌두 사원

 

↑ 사원에서 바라 본 늦은 오후의 호수.
'내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사진이 나왔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 바로 위의 사진을 찍고 있던 나.

를 Vivek이 찍은 것.

 

  우리는 다시 배를 타고, 육지를 향했다.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평화롭고 기분좋은 행위였기에 나는 땅이 가까워지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 가까워지던 땅.

 

↑ 역시 위 사진을 찍고 있던 '나'

를 찍은 Vivek의 사진.


↑ 곧 모습을 감출 햇볕을 온 몸으로 받으며..

 

 

   포카라 시내 여행을 모두 마친 우리는 마지막 코스였던 포카라 호수를 떠나기가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잠시 잔디밭에 앉아 쉬기로 했다.
저 멀리 커다란 카메라를 든 남자와 마이크를 든 여자가 호수 주변을 온통 바지를 적신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Vivek이 잠시 그들을 살피고 돌아오더니, 'National Geography'에서 나왔다고 했다.
네팔은 자연이 파괴되지 않고, 희귀 생물이 많이 살고 있어서 자주 외국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찾아온다고 했다.
그들은 호수 주변 생물을 촬영하는 것인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들과 우리들, 몇몇 사공들 이외에는 호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정말 한껏 평화를 들이킬 수 있었다. 해가 지는 호수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줄곧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우리는 다시 말을 잃었다.

   

 
 
 


  

  빠르게 해가 지던 호수 주변에는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과 많은 소들, 그리고 독수리가 있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동물들에게 다가가도 그들은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슬쩍 눈동자를 돌려
나를 보고서도 다시 제 할 일을 묵묵히 계속해 나갔다. 그들에게 사람은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침내 해가 지자 우리는 호수를 떠나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좀 쉬다가 점심에 갔던 그 가게로 다시 한 번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 곳에서 Vivek이 가지고 있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많이 놀랐고, 부끄러웠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을 수 있을까?
먼 미래는커녕 하루하루 다음 날의 일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숨쉬는대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통나무처럼 느껴졌다.

  꿈을 가진 사람이 아름답게 보인다.

  하고, 늘 생각하지만 왜 정작 나 자신은 그리 되지 못하는건지...

 
  나는 Hot lemon tea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네팔 음식을 먹으며 배를 채웠고, 역시나 어김없이 밤만 되면 정전이 되는 네팔의
사정 덕분에 손전등으로 힘들게 불빛을 비추며 샤워를 하고는 일찍 쉬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트레킹의 시작이었다.
나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 잠이 들었다.

이제는 히말라야로 고! 고! 고!

 

 

 

 

 

마지막으로 아쉬우니까 포카라 호수의 풍경 하나 더. ^^

 

 

 

The peaceful place, Pok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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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⑤

2007/2/17

  

조금 여유있게 일어났다.
어차피 어제 permission을 받지 못해 산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택시 한 대를 빌려서 포카라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포카라는 네팔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이다. 외국인이 많이 찾고, 네팔인들도 신혼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나 제주도쯤 되는 도시같다.
그리고 정말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카트만두의 복잡함과 다닥다닥 붙은 건물이 네팔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나에게는 또 다른 네팔의 일면을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였다.

 맨 처음 간 곳은 Devi's Fall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폭포의 하나이다.
그러나 Devi는 네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Vivek이 설명해준 말에 의하면 Devis라는 한 스위스인이 이 폭포에서 여자친구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원래는 별로 유명한 폭포가 아니었지만 그 후에 점점 유명해져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굉장히 위험해 보여서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지만 폭포의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폭포였다.
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보통 높이에서 지하를 향해 강한 물줄기가 떨어져 내린다.

 

↑ Devi's Fall 윗 부분.
물의 힘에 의해 바위가 둥글게 깎여나갔다.

 

 

Devi's Fall을 본 후, 우리는 Gupteshwor Mahadev Cave로 갔다.
예전에 Vivek이 사진으로 보내준 적이 있는 그 동굴이었다.
들어갈 때 외국인용 입장료와 네팔인 입장료가 있는데, 놀랍게도 나 역시 네팔인 요금으로 냈다.
나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Vivek은 계속 내가 네팔사람같다고 말해왔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동굴 입장료 사건 이후로 나는
Vivek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티켓 부스에서 나에게 네팔인용 티켓을 주는 일이 줄줄이 이어졌다.

 지하로 뚫린 거대한 동굴 안을 한 발짝 한 발짝 들어서며, 우리나라의 고수동굴이나 고씨동굴은
나름대로 안전시설이 잘 되어있어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딱히 안전바 같은 것도 없고,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돌이 굴러 떨어지는가 하면,
(아슬아슬하게 피했음) 끊임없이 물이 뚝뚝 떨어졌다. 거기에다 건기와 우기의 차이가 커서
들어갈 수 있는 깊이가 계절마다 다르다고 하는데, 마지막 한계점에 출입금지 판 같은 것도 없어서
다니다가 위험해 보이면 알아서 멈추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거기에다 불빛을 설치하지 않은 곳도 있어서 어둡고 축축하고 가파른 동굴 안을 손으로 더듬으며 나아가야 했다.
그래도 정말 제대로 동굴을 탐험하는 기분은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자연산 동굴의 모습이 웅장해서 새삼 물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 동굴 안에서의 나

 

↑ 사진 찍는 나


 

↑ 동굴의 끝.
왠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갈라진 동굴 틈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져 내리고, 그 빛은 물을 따라 바로 내 앞까지 흘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네팔 곳곳에 크고 작은 사원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동굴 깊숙이에까지 사원을 발견한 것이다.
힌두 사원이었는데, 아쉽게도 사원을 찍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사진 촬영은 하지 못했다.
시바와 파르바티(Parvati)의 아들인 가네사(Ganetha)신전이었다.
네팔 사람들은 가네사를 참 좋아해서 가네사 신전을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듯 하다.
그러나 사실

'가네사는 아버지 시바가 잘 때 떠들며 놀다가 잠이 깬 아버지의 화난 손길에 목이 잘려버린 비운의 신이다.
나중에 이를 불쌍하게 여긴 어머니가 코끼리 목을 잘라서 붙여주었기 때문에 코끼리 얼굴에 사람 몸을 하고 있다'

라고 Vivek에게 들었는데, 지금 다시 검색해서 알아보니 어머니 파르바티가 목욕하러 들어가면서 입구를 지키라고 부탁했는데,
아버지인 시바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화가 난 시바가 목을 잘라버렸다고 쓰여 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듯 하다.
아무튼 배불뚝이 코끼리 신이 왠지 친근감있어서 네팔을 돌아다니면서 나도 가네사가 곧 좋아졌다.
마지막에는 가네사 조각품을 사기도 했다.

 

↑ 가네사의 그림

 

   다음에는 Pokhara Museum에 갔다. 솔직히 박물관 치고는 굉장히 열악하다고 생각했다.
민속 박물관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놀라운 것을 알았다.
네팔과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생활 모습에서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과거의 모습일수록 더욱 그랬다. 네팔의  역사나 전통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네팔의 전통문화는 한정적이지 않았다. 70개의 카스트가 섞여 살아서 그런지 너무나 많은 문화들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그 많은 종족들이 통일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Vivek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박물관을 모두 구경한 후, 우리는 쉴 틈도 없이 곧바로 Seti River에 갔다. Seti는 네팔어로 하얗다는 뜻이다.
즉 하얀 강이라는 말이다. 물이 녹색, 파란색, 푸른색으로 보인 경험은 많지만, 하얀 물이라니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바다에서 파도가 부서질 때 나는 거품같은 색을 지닌 곳을 상상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강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하얀 색의 강이었고, 굉장히 차가웠다.
포카라를 꿰뚫고 지나가는 젖줄같은 강이었다.

 

↑ Seti River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잠시동안 바라보았다.
정말 거대한 어머니의 젖줄같은 강.

Vivek에게 물이 하얀 이유를 물었는데, 모른다고 했다.
석회수인걸까?
아마도 근처에 동굴이 많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미끌미끌한지 만져보고 싶었지만, 물의 흐름이 너무 거세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Vivek은 겁도 없이 툭 울타리를 넘더니 물을 만지며 좋아했다.


 강을 구경하고 구석에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니 그곳은 힌두 사원이었다. 시바를 모시는 곳이었다.
한 네팔인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나오더니 뭔가 계속 말을 했다.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굉장히 반가워하는듯 했다. 나중에 Vivek의 말에 의하면, 그 할아버지는 사원의 사제였다.
그러나 특이한 것이 보통은 Cast가 브라만이어야 사제를 할 수 있는데, 그 할아버지는 Vivek과 같은 체트리임에도
불구하고 사제였다. 그런 사람이 드물게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사제 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같은 체트리를
만나서 그런지 둘은 반가워하며 이야기했다. Vivek이 그렇다고  말해준 것은 아니지만 둘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체트리'라는 단어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제 할아버지는 그 사원을 찾아온 사람들과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고, 방명록도 보여주며 나에게도
방명록을 쓰라고 하셨다. 망설이다가 주소를 써주었다. 앞을 뒤져 보니 내 앞에도 딱 한 사람의 한국인이 있었다.
다 쓰고나자, 할아버지는 나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싶어했다. 나는 힌두교는 아니지만 기꺼이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다.
힌두교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마 한가운데에 티카를 찍는다.
이것은 축복을 기원하고, 신의 가호를 비는 의미로 대부분의 여자들은 매일 찍고 다니며,
남자들도 많은 사람들의 이마에 자리잡고 있다. 색소와 밥풀로 만들며, 여러 종류의 티카가 있어서
특히 여자들의 경우에는  기혼녀와 미혼녀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기혼녀의 경우에는 매일 아침 남편이 티카를 찍어준다.
또한 특별한 날에는 누나나 여동생이 남자 형제에게 티카를 찍어주는데, 티카의 수로 그 사람의 여자 형제 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줄곧 티카를 찍은 사람들을 보며 참 신기했는데, 나 역시 티카를 경험할 수 있어서 기뻤다.

 

↑ 티카와 함께 축복을 받는 모습
 

 

  그 다음에는 전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힌두 사원에 갔다.
이제까지 보았던 힌두 사원들은 솔직히 건물 한개가 전부였는데, 이 사원만은 여러 건물이 있는 큰 곳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대웅전, 극락전 등 많은 건물들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는 사원을 기대했던 나는
네팔의 거리 곳곳 한 평 남짓한 크기에 자리잡은 네팔 사원이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사원의 입구에 막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다가왔다. 한 네팔 아저씨였는데, 나에게 이 사원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어했다.
이 사원에서 살면서 수도를 하는 사람인듯 했다. 그는 건물들을 돌며 나에게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주었다.

 

↑ 사원의 전경

 

 
 


 

  아침부터 여러 곳을 다녀야 했으므로 점점 지쳐갔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포카라 시내로 돌아갔다.
점심은 Fried Rice였는데, 말 그대로 볶음밥이었다! 나는 이후로 이 메뉴를 즐겨 먹었다.

 

↑ 점심을 먹은 포카라 시내의 식당. 내가 이 곳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저녁에도 다시 들렀다.

 

↑ 식당에서의 Vivek. ㅎㅎ 드디어 사진 공개!
왠지 글을 읽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않을까 해서
얼굴 공개를 미루고 있었다. 혼자 한겨울 만난 Vivekㅋㅋ

 

  식당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마쳤는데, Vivek이 놀라운 사실을 말해줬다.
사실은 내가 비행기에서 만난 Ram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가 어떻게 Vivek의 전화번호를 안 걸까?
그러나 곧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글로 의사소통하고자 넘겨줬던 수첩에서 슬쩍 Vivek의 전화번호를
보고 몰래 옮겨 적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나를 몹시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다.
Vivek은 지금 내가 카트만두가 아닌 포카라에 있어서 만날 수 없다고 말했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Ram은 정말 자주 전화를 걸어왔고 Vivek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포카라의 스투파에 가기 위해 출발했다.
스투파는 호수 한가운데 있는 산의 꼭대기에 있으므로, 우리는 스투파에 가기 위해 호수를 건너고, 산을 올라야 했다.
따라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보트를 타기 위해 간 선착장은 정말 말 그대로 하늘이 높고,
싱그러운 풀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나는 정말 포카라에 반해버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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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④


2007/2/16

 

밤새 너무 추워서 몇 번이나 잠을 깼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결국에는 새벽 4시반부터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마나 추웠던지 침대 속에 누워있는 것보다 차라리 공기 중에 있는 것이 나았다.

 

↑ Vivek을 기다리며 찍은 이른 아침 호텔 밖 풍경.
도심 한가운데지만 아무데서라도 사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침 일찍 온다던 Vivek은 7시쯤 문을 두드렸다.
찾아온 Vivek을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추위에 sensative하다고 주장하던 그는 완전히 무장한 차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동여맨 Vivek과 함께 짐을 등에 지고, 버스를 타러갔다.
버스라기보다는 조금 큰 봉고차같은 느낌인데, 그 안에 꽉 차게 작은 의자를 들여놔서 통로도 거의 없고 비좁았다.
옆의 사람과 거의 완전히 꽉 끼게 앉아야 가능할 정도였다.

Vivek과 버스기사가 잠깐 실랑이를 벌였다. 네팔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나중에 Vivek이 다른 큰 버스가 없는지 물었다고
말해주었다. 아마도 나에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I'm okay."를 연발했다. 사람이 모두 찰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버스는 출발했다. 네팔의 모든 버스는 사람이 꽉
차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이 모두 타자 버스는 포카라를 향해 털털거리며 출발하였다.

 Vivek의 말로 포카라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실제로 걸린 시간은 6시간이 넘었다. 고작 200km밖에 안되는
거리라서 우리나라로 치면 2시간반~3시간이면 충분할텐데 네팔의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 우리나라의 직선도로와는
달리 산길을 꼬불꼬불 달려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가는 길의 창 밖 풍경.
산의 크기가 어마어마한데도,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눈에 띈다.

 

 그렇지만 6시간의 드라이브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조차 한국과는 많이 달라 보였고, 오히려 같은 것을 발견하면 더욱 반가워서 Vivek에게 신나게 알려주었다.
Vivek은 최대한 나에게 많은 것을 설명해주려 애썼고, 다른 나라의 풍습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버스는 여러 시간을 달려 휴게소에 잠시 멈추었다. Vivek은 무엇을 먹겠냐고 물었다. 왠지 식욕이 없던 나는 그냥 차를
마시겠다고 했고, Vivek 역시 Hot tea만을 마셨다.
아직은 Vivek과 다소 서먹서먹했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혼자 다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게다가 계속 Vivek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 문제 없이 2주나 휴가 낼 수 있는 회사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 Vivek과 hot tea를 마신 휴게소.
우리가 탄 버스의 지붕이 보인다.

 

   중간에 유명한 힌두 사원인 'Manakamana Temple'을 지났다.
Vivek은 그 사원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네팔 최초로 만들어진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만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사원은 우리의 일정에 없었다. 단지 이 사원을 보기 위해 이 곳에 내리면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사원의 입구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나는 이 사원 입구에 서 있게 되리라고, 이 당시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 =_=

 

↑ Manakamana Temple의 입구.
지혜의 눈으로 꾸며져 있다.

 

   잠시 다른 휴게소에 들러서 이번에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이미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벌써 오후 3시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 시간으로 치면 오후 6시. 나는 일어난 이래로 고작 차 한잔을 마셨을 뿐이었다. 전에 들렀던 휴게소에서 음식을
먹을걸 그랬다고 매우 후회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네팔인들은 아침을 먹지 않는다. 차 한 잔이 바로 그들의 아침이며,
점심을 11시쯤 푸짐하게 먹고, 다시 밤 8시쯤 저녁을 먹는다. 점심은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달 바트 타카리였다.
Vivek은 내가 물을 먹고 탈이 날까 염려된다며 식당에서 준 물을 못마시게 했다. 대신 mineral water를 사주었다. 자신의 고향이나
시골 지역에서는 괜찮지만, 카트만두 부근에서는 함부로 물을 먹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점심값도, 차값도 모두 Vivek이 은근슬쩍
내버려서 나는 점점 미안해졌다. 네팔어로 주인과 이야기하다 어느 순간 슬쩍 내버려서 내가 내겠다고 말할 틈이 없었다.

 

↑ 아름답던 오후의 풍경.

 

   버스는 다시 포카라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교통 체증이 매우 잦았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나중에 Vivek이 설명해주었다.
바로 다음날이 시바 라트리(Shiva Raatri)라는 축제인데, 그 축제에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아이들이 장난을 친다는 것이었다.

그 장난의 내용은 이러하다.
그들은 대나무나 줄같은 것을 이용해 도로 양 옆에 서 있다가 차가 오기 전에 재빨리 그것을 당겨 길을 막는다.
차가 어쩔 수 없이 멈추면 운전사에게 가서 기부를 요구하는 것이다.
상당히 위험하게 느껴지고, 운전사를 화나게 할 것 같지만 네팔인들은 그러한 상황에 익숙한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다행히도 버스가 느린 속도로 달리는 데다가 운전사들도 인심이 좋아서 웃고 넘어갔다.
그러나 거의 1분 간격으로 만나는 아이들에 지쳤는지 나중에는 운전사도 요령을 피우며, 건너편 버스를 지나가게 해주려고
잠깐 줄을 내린 사이 슬쩍 지나가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남자아이들은 때로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발길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내가 보고 웃으면 씨익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자 아이들도 수줍게 웃으며 숄 사이로 작은 손을 빼어 살짝 흔들었다.
운전사가 아이들에게 기부를 하면, 아이들은 미리 준비해놓은 티카를 이마에 찍어주었다.

 

 

↑ 아이들이 길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포카라로 나아갈수록 단순히 줄이나 대나무가 아니라 타이어를 추처럼 달아놓은 장치나, 끈을 도르래삼은 장치도 있어서
나와 Vivek은 감탄을 했다. 거기에다 때로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께서도 신나게 가세하고 계셔서 너무 웃겼다.


 

↑ 들판을 달리는 버팔로 떼들.
네팔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동물들을 아무데서고 볼 수 있었다.

 

  이렇듯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평화로운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새 포카라에 도착하였다.
내내 맑았던 도로의 날씨와는 달리 포카라는 어둑어둑하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United Hotel이라는 곳에 갔다.
버스 안에서 Vivek과 친해진 몇 몇 사람들과 합승했다. 신기하게도 Vivek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하고 쉽게 말을 트고 친해졌다.

  

  호텔에 짐을 풀고, 포카라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었으나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놀라운 것은 비가 내리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네팔에서는 비가 내리면 그냥 맞거나, 아니면 돌아다니지 않는다. 우산을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매우 적었다.
Vivek역시 추위에 sensative 하기 때문에 빗속을 돌아다니지 말자고 했다. 게다가 Vivek은 이미 내가 오기 전 한 차례 빗속을
걷다가 감기를 덜컥 얻어 고생 중이었다.
나와 Vivek은 그냥 호텔에서 수다를 떨었다. 역시 Vivek이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들었다.
Vivek의 친척들 이야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또 네팔의 역사까지!
놀랍게도 네팔은 통일된 지 약 100여년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 전까지는 이 땅이 여러 개의 나라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세계사를 배웠어도 네팔에 대한 것은 배운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 외에 몇 가지의 네팔말을 배우기도 하고, 우리가 펜팔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니 이제서야 오랜 친구같은 느낌이 들고 서먹한 것이 좀 가셨다.
더구나 중간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호텔 종업원이 가져다 준 초를 가운데 놓고 이야기하는데, 친구들이랑 수학여행 온 기분이
들고 뭔가 색다른 느낌이라서 얘기도 술술 나오고 재미있었다. 

 우리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호텔 매니저가 와서 내일 트레킹을 위해 permission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와 Vivek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갔다. 그러나 사진 2장이 필요하다는 게 아닌가!
다행히도 사무실 앞에는 나처럼 대책 없는 사람들을 위한 즉석 사진집이 있었다.
흰 천막 앞에 서서 대충 사진을 찍고 디카를 프린트에 연결해서 바로 뽑아주었다.
사진은 정말 지금까지 찍어 본 것중에 최악이었다. Vivek은 내 사진을 보고 계속 웃으며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고 나름대로
위로해주었다.  

힘들게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해서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이런!
 
문이 잠긴 것이 아닌가! 오후 5시밖에 안되었는데 사무실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Vivek이 경비에게 이유를 물으니 내일이
축제라서 일찍 문을 닫았다고 했다. 게다가 내일은 축제라서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가증이 없으면 산을 오를 수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Vivek과 나는 다시 여행계획을 세워야 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간 후 거기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할 예정이었던 우리는 예약을 취소하러 비행기회사로
향했다. 그런데 그나마 반가운 것은 이번에 눈이 많이 내려서 비행기가 모두 취소되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리쪽 과실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모두 환불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 Poon Hill로 목적지를 다시 잡았다. 다음 날도 축제때문에 허가를 받을 수 없으므로, 트레킹
이후에 하기로 했던 포카라 시내 관광을 내일 하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 온 우리는 다시 수다를 떨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Vivek이 데려 간 식당은 네팔의 전통춤을 공연하는 곳이었다. 10여 명의 무용수들이 네팔에 있는 많은
카스트들의 전통 의상을 입고 각각의 춤을 추었다. Vivek의 말에 의하면 네팔에는 약 70개의 카스트가 있는데, 저마다 전통과
관습이 모두 다르다고 했다. Vivek은 체트리인데, 전사 계급이다.
따라서 체트리의 남자들은 관례 후에 모두 쿠쿠리 라고 불리는 칼을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 양 손에 초를 들고 추던 춤

↑ 춤을 추는 여자들이 참 예뻤다.


 

  네팔의 전통 음악과 춤은 매우 신기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은 대부분 구슬프고 느릿한데 비해, 그들의 것은 코믹하고 빨랐다.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한껏 강조한 그것들이 재미있었다. 게다가 깜짝 놀란 것은 Vivek이 시킨 Momo라는 음식이 바로
만두였다는 사실이었다. Vivek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라며 시켜주었는데,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바로 만두였다. 아마도 중국을
통해서 비슷한 음식이 전해진듯 했다.

 

http://minihp.cyworld.nate.com/pims/board/video/videobrd_view.asp?tid=16173617&item_seq=15585109&board_no=37&cpage=1&list_type=0

↑ 전통춤 동영상


 

  실컷 배부르도록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방 앞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별로 한 게 없는데도 왠지 피곤해서
곧 잠들 수 있었다.

추위로 역시 자주 깨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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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③



나와 Vivek을 태운 택시는 카트만두의 타멜(Thamel)거리로 들어섰다. 
타멜 지구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구로 각종 호텔이나 레스토랑, 관광 상품 가게가 즐비한,
우리나라로 치면 이태원이나 인사동 정도 되는 거리이다.
만약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머물 생각이라면 타멜 지구에 머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네팔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 다소 얼마간의 예외를 인정받는 지역이니 말이다.

 

↑ 타멜지구.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나 상점이 즐비하다.
간판도 모두 영어이며, 여행 중 필요한 물품을 쉽게 살 수 있다.

 

 택시는 Blue Diamond라는 이름을 가진 호텔 마당 안에 섰다.
내가 택시비를 치루려 했지만, Vivek은 자기가 낼름 내버렸다.

1층 카운터에 들어가니 검은색 비니 모자를 쓰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열쇠를 받았다.
내 방은 3층의 Single Room이었는데 당연하게도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실제로 네팔에 머무는 내내 단 한번도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방은 깔끔해보이기는 했지만, 썩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사치였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Vivek은 방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고, 나는 건성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Vivek은 피곤하지 않냐며 쉬는 게 어떻냐고 했지만, 나는 왠지 들뜨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Well, Shall we go?"

 "Yes!"

 

↑ 첫 날 머문 Blue Diamond

 

  원래 본래 예정은 카트만두 공항에서 바로 포카라(Pokhara)로 출발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공항에서 너무 시간을 끄는 바람에 그 날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저녁 시간이 비게 되었다.
Vivek은 호텔 바로 앞 회사건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곳에는 Vivek의 친구가 있었다.
Vivek보다 20살 이상 많아보이는 친구였다.
그는 타멜 지구에서 관광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Vivek은 그에게 포카라까지의 교통수단과 호텔 등의 예약을 부탁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의 여행 일정을 의논했다.
그는 이러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흔히 그렇듯 상당히 수완이 좋아보였고, 말도 꽤 잘했다.
영어와 네팔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Vivek에게 나 혼자서도 충분히 네팔여행을 할 수 있다고 여러 번 말하였으나 Vivek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기는 이미 내가 올 때를 대비해서 미리 일을 다 끝내놓았고, 2주간의 휴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Vivek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나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 설득은 커녕 Vivek의 말에 대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약간의 실랑이 끝에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항상 메일로도 'I'm busy'를 연발하곤 했음을 잘 아는지라 무척 걱정되었다.
'정말 2주나 휴가를 내도 괜찮은걸까?'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솟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다.

   대강의 여행일정을 짜고, 교통수단이나 호텔비를 미리 치루었다.
회사에는 몇 대의 컴퓨터가 있는데 놀랍게도 모든 모니터가 모두 한국 제품이었다. Samsung과 Daewoo, LG가 주를 이루었다.
Vivek의 친구는 'Nepal is Second Korea'라며 농담을 했다.

예약을 하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자 Vivek은 잠시 부근을 둘러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회사 안에서 지루하던 나로서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처음 발을 디딘 네팔의 거리는 너무나 이국적이고 낯설어서 나는 완전 넋을 빼놓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 굉장히 복잡한 거리, 까만 피부의 사람들이 내 시선을 단숨에 앗아갔다.
거리에는 현대적 건물과 옛 건물 또는 사원들이 일말의 울타리도 없이 뒤섞여있었다.
거리에도 사람, 동물, 오토바이 등이 혼재해 있었으며 매우 복잡했다.
특히 오토바이가 무척 많았는데, 그들의 난폭한 운전과 클랙슨에 기가 질려버렸다.

 

http://minihp.cyworld.nate.com/pims/board/video/videobrd_view.asp?tid=16173617&item_seq=15076727&board_no=37&cpage=1&list_type=0

↑ 카트만두 거리 동영상

 

 


 

 그토록 복잡한 거리를 발길 닿는대로 걸으며 Vivek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80% 정도를 Vivek이 말하고, 나는 듣기만 했다.
Vivek은 중간중간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내가 이해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해 주었지만,
다시 이야기해준 것조차 이해 못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
사정 없이 클랙슨 울려대는 오토바이 무리들.

특히 그들은 내 발의 몇 cm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서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발에 오토바이 바퀴가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느릿느릿 거리를 활보하는 소, 닭, 개 등.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릭샤들.
거리 곳곳에 가득 찬 먼지와 매연, 그리고 쓰레기들.
뒤죽박죽 뒤섞인 건물들과 미로같은 도로.
거리 곳곳에 있는 작은 사원들.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해서 나는 지치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걸었다.
사실 Vivek의 이야기보다 거리 구경이 더 재밌었다.
조금 식은땀이 나기도 했다. 이토록이나 낯설고 어지러운 거리를 혼자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Vivek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외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 거리 곳곳에 존재하는 사원들.
크고 작은 사원, 힌두사원, 불교사원 등 다양한 사원이 혼재해있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타멜 지구를 벗어나 두르바르 광장을 지나고도 한참을 계속  걸었다.
Vivek은 그 동안에도 끊임없이 네팔의 역사나 문화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네팔의 국기였다. 해와 달이 귀엽게 그려진 국기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빠른 속도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리자 거리는 금새 캄캄해졌다. Vivek은 이제 서둘러 돌아가자고 했다. 우리는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너무나 복잡한 길때문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Vivek은 카트만두에 3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길을 잃었다. 그 정도로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고 미로같이 엉켜 있었다.
Vivek이 여러 번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서야 우리는 타멜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새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시 Vivek의 친구에게 들러 예약을 완료하고, 저녁을 먹으러 다시 나왔다. Vivek은 네팔 음식을 먹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물론 네팔에 와서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로 꼽고 있었으므로, 나는 당장에 승락했다. Vivek은 좁은 골목의 이층 가게로 안내했다.


 조명의 조도는 매우 낮고, 창은 있되 창문이 없으며, 뭔가 부산하게 느껴지는 식당이었다. Vivek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거의 50개가 넘는 메뉴가 적혀 있었으나, 나는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전부 다 처음보는 메뉴였던 것이다.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Vivek이 알아서 주문을 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달 바트 타카리(Dal Bhaat-tarkaari)라는 음식이었는데, 네팔에서 매 끼니 먹는 바로 일상식단이었다.
밥에 렌즈콩과 채소를 곁들인 카레 요리이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밥, 콩, 채소, 카레가 아니었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맛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쟁반 가득 담겨진 밥을 보고 경악하며 한국에서는 이의 1/4도 먹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식사를 시작한 나는 곧 밥의 양이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쌀이 한국보다 훨씬 가벼웠던 것이다.
훌훌 불면 그만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가볍고 텅 빈 쌀은 생각보다 배에 차지 않았다.
따라서 그렇게 많은 양을 한번에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 외의 반찬은 모두 한국음식 무언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입에는 잘 맞았다. 그러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집에 식구들이 와 있어서 집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Vivek은 커피 한잔을 시켰을 뿐 식사는 않고, 내가 먹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다.
거기다가 식당의 주인과 종업원들도 내가 신기했던지 테이블 주위에 몰려들어 내가 먹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고작 두 평 남짓한 좁은 식당에는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나는 대여섯명의 네팔 남자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처음 보는 네팔 음식을 먹어야 했으므로, 정말 체할 지경이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정신없이 먹은 후 네팔차를 마셨다.
계피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특이한 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호텔 방까지 데려다 준 Vivek은 인사를 한 후 손을 흔들며 집으로 갔다. 혼자 남은 나는 샤워를 하고 싶어져,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 경악해야 했다.
뜨거운 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이 찬물로 샤워를 했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나왔는데, 방 안도 무척 추웠다.
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침대 속으로 돌진했으나 아뿔사! 이불 속은 완전히 얼음장이었다.
나는 약간 남았던 나의 체온마저 침대시트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방 구석에 있는 온풍기를 최대로 틀고 그 앞에서 몸을 녹이려 했으나, 온풍기의 기능이 너무 미약해서 이게 정녕
따뜻한 바람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카메라로 셀카를 찍고, 그 날의 일기를 녹음으로 저장했다.

덜덜 떨릴만큼 추웠으나, 곧 몸의 체온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냥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밤새 추위에 떨며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네팔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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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미리 부탁해놓은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잠에서 깼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태국의 아침

 


샤워를 마치고나니 모닝콜이 울렸다.
간단하게 짐을 정리한 후,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호텔 부페에는 나 이외에도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타이 항공 기내식은 항상 양이 많음을 알기에 가볍게 과일 위주로 아침식사를 했다.
태국의 열대과일은 여전히 맛있었다.

 호텔 프론트에 택시를 부탁하고, 짐을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서양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나에게 공항까지 택시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어제밤에 350BATT를 냈다고 하니 혀를 내두르며 놀랐다. 내가 심하게 바가지를 쓴건가 싶어서 슬슬 불안해졌다.
아침에는 러시아워가 없다는 호텔 직원의 말에 여유를 가지고 출발했는데,
정말로 뻥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서 금방 신공항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의 택시비는 195BATT. 어제의 반값이었다. ㅜㅠ

 공항 앞에는 경찰들이 커다란 경찰견과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화약 냄새를 맡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딱히 죄 지은 게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긴장되었다. 왠지 그 큰 개가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보딩 패스 후, 공항세를 냈는데 무려 700BATT나 했다.
너무 비쌌다.

 시간에 여유가 많았으므로 천천히 신공항을 구경하며 게이트로 이동했다.
게이트 앞에는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앞에는 죄다 한국인이었었는데,
네팔 가는 비행기 앞 게이트에는 한국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날 뿐 아니라 네팔에 있는 내내 단 한번도 한국인을 보지 못하는 기현상이 이어졌다.
해외에 여러 번 가보았지만, 한국인이 이렇게까지 없는 곳은 처음 보았다.)
게이트 앞에는 얇은 숄을 두른 여자들과 특유의 모자를 쓴 검은 피부의 네팔 남자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 모두 나를 자꾸만 쳐다보았다. 그 외에는 50대 가량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있었다.

 나는 혼자 의자에 앉아서 Lonely Planet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여행 직전까지 연수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분히 Lonely Planet을 읽고있자니 오히려 걱정이 늘었다. 조금 불안해졌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

그러나 Oh, my!
내 앞, 뒤, 옆, 대각선 자리가 모두 네팔 남자들이었다.
까만 피부에 큰 눈을 꿈뻑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데다 특유의 독특한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9칸짜리 정사각형 숫자칸에서 나는 5의 위치에 앉고, 나머지 숫자칸에 모두 네팔 남자들이 앉아있는 형상이었다.
게다가 나를 제외한 그들 모두가 한 일행이었다.
어째서 네팔 단체 일행 한가운데 내 좌석이 끼게 된건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보딩 패스를 할 때 잠깐 혼선을 빚은건가...

 아무튼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과자를 나누어주고, 조금 후에는 기내식을 나누어주었다.
서울에서 태국을 갈 때의 메뉴는 Beef와 Chicken이었는데, 태국에서 네팔갈 때의 메뉴는 Mutton과 Chicken이었다.
아마도 특정 종교인의 비율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리라.
뭐, 나는 언제나 Chicken이니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다시 헤드폰을 끼고 잠을 청하려는데, 내 오른쪽에 앉은 네팔인이 말을 걸었다.

"Hello, Where are you from?"

 그는 일행 중 가장 어려보이는 청년이었다. 마침 비행이 슬슬 지루해지고 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얻은 그는 여러 가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나는 단 한마디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이 네팔어인지 영어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만큼 그의 억양은 강했다.
나는 당황해서 몇 번이나 되물었고 그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결국은 수첩과 펜을 주고 필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는 당황하며 계속 말을 반복할 뿐 좀처럼 무언가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계속된 요구에 뭔가를 끄적이긴 했지만 그가 하고 있는 말 전체가 아닌 한두 단어만을 적을 뿐이었다.
나는 'Full Sentences'를 요구했지만, 그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결국 남은 비행 시간 내내 우리는 대화를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1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한 말의 거의
대부분은 'Excuse me?'나 'Sorry?'였다.

 별다른 걱정 없이 출발한 나였지만 그와 대화하면서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Vivek의 영어가 매우 훌륭해서 모든 네팔사람들이 그 정도의 영어는 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모두 비행기에서 만난
청년과 같다면 혼자 여행이 가능할까 싶었다. 슬슬 걱정과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네팔에 거의 다 와가는데...
게다가 문득 Vivek이 네팔인은 영어를 학교와 공적기관에서 쓰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말할 일은 없기 때문에
Speaking에 약하고 발음도 좋지 않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Vivek과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튼 그래도 어렵사리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Ram Kumar Lama였다. 나보다 두 살 어렸고, 누나가 하나 있다고 했다.
나도 남동생이 있다고 했더니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그때부터 자꾸 나를 'Sister Le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여권에 끼워진 내 사진을 보더니 자꾸만 사진을 달라고 졸랐다. 하나만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비자를 받기 위해 준비해 온 사진을 그에게 줄 수는 없었다. 그 사진은 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나름대로 설명했지만,
잘 통하지 않은건지 그는 계속 사진을 갖고 싶다고 우겼다. 나중에는 비자를 발급받고 나서 달라는 얘기를 했다.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해져버렸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그는 자기가 먼저 내려서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다고 하고는 나가버렸다.
나는 최대한 그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나갔다.
사진을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비행기에서 만난 친구 Ram


 

그러나 나는 그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곧 알았다.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줄이 굉장히 긴데다가 비자 발급이 굉장히 느렸던 것이다.
나는 무거운 짐을 들고 계속해서 기다려야했다. 중간에 환전도 했지만 좀처럼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시간이 40분을 넘어가면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비행기 도착시간도 예정보다 상당히 늦어져있었던 것이다.
출발 전에 이상할만큼 Vivek과 연락이 잘되지 않아서 충분히 사전에 얘기를 나누지 못했었다.
Vivek은 공항에 마중나오려 했고, 나는 나 혼자 카트만두까지 가서 연락할테니 카트만두에서 기다리라고 mail을 보냈었다.
그리고는 답을 받을 여유도 없이 곧바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Vivek이 나올지, 안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미 상당한 시간을 기다렸을 터였다.

 간신히 비자를 다 받고나니 이미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서둘러 나왔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 시간동안 비자를 받고 서 있었는데, 아직도 짐이 다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닌가!
나는 역시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짐까지 가지고 모든 절차를 다 마치고 났을 때는 이미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드디어 네팔 땅에 정식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네팔의 국제항 Tribhuvan Airport.
국제항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매우 작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공항 밖을 나오자마자 나는 몰려드는 검은 사람들에 깜짝 놀랐다.
까만 피부의 남자들이 모두 일제히 몰려들어 왁자지껄 떠드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택시 기사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 모두의 발음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서의 Ram과 비슷한 강한 발음이었다.
갑자기 왈칵 겁이 났다. 여행을 결심한 이후로 처음으로 무서웠다.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어쩔줄 몰라했다.

 "I don't need a taxi now."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 때였다.

무슨 네팔어가 들리면서 그 사람들을 헤치고 내 앞에 누군가가 쓰윽 다가와 섰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Hello, How are you?"

 바로 나의 친구 Vivek이었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무서움이 사라졌다. Vivek이 나타나자 내 주변에 바글바글하던 검은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 정말 놀라운 기분이었다.
6년 넘게, 그리고 횟수로는 7년째 펜팔? 아니 e-pal로서 지내왔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실 직접 만날 것을 기대해본 적도 없었다.
Vivek은 이제껏 봐 온 사진덕분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지만, 사진보다는 훨씬 나은 얼굴이었다.
다른 네팔인들은 다 그 얼굴이 그 얼굴로 똑같이 보이는데 Vivek만은 전혀 다르게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거기다가 특유의 몸 냄새가 나지 않고, 좋은 향이 났다. 향수같은 것이 아니라 뭔가 은은하고 수수한 향이었다.

Vivek은 나에게 저쪽으로 잠시 걷자고 불러냈다.
우리나라 공항 주변은 도로 뿐인데, 네팔의 공항 주변은 온통 풀들이었다. 그리고 어딜 둘러보아도 온통 산이 보였다.
카트만두는 분지이기 때문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과 우리나라와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높은 산들이
경이롭게 보였다. 햇볕이 맑은데, 은근히 쌀쌀하긴 했다.

 우리는 잠시 산책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너무나 다행인 것은 Vivek의 발음은 굉장히 깨끗하고 명확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비행기에서 만난 소년의 이야기를 하며 Vivek의 발음 역시 그럴까봐 걱정했는데 발음이 좋다고 칭찬하자
Vivek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I'm a teacher"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회사일로 싱가폴 사람들을 안내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싱가폴 사람들의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했다.
Vivek은 나 역시 그런 영어를 할까봐 무척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말하는 영어가 clear해서 알아듣기 쉽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Vivek이 물은 것은 내 이름을 도대체 어떻게 발음하느냐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내 이름 스펠을 'Jihye'로 썼었다.
솔직히 지금에서야 생각하건데, 외국인이 저 이름 스펠을 보고 '지혜'라는 발음을 할리는 절대 없을 것이다.
여권에는 스펠이 'Jeehae'라고 되어있는데, 이쪽이 좀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항상 나를 Jihye로 불렀던 Vivek은 가끔씩 내 이름 발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해왔었던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발음해주자 굉장히 좋아하며 따라했다.
나 역시 Vivek이 '비벡'인지 '비베크'인지 헷갈렸었는데, 다행히 내가 수년간 생각해왔던 '비벡'쪽이 맞는 발음이었다.

 몇 가지 대화를 나누고나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나는 굉장히 부끄러웠고 낯을 가리고 있었다.
7년째 친구라고는 하지만 얼굴을 처음 보는데다, 상대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줄곧 Vivek이 대화를 이끌어야 했다.
네팔 여행 초반 내내 내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Vivek은 내가 걱정됐었다고 얘기해주었다.
내가 너무 Shy해서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가 예전에 나는  Korean boy들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었었는데 그것을 용케 기억하고는
어째서 부끄러워 하느냐고 되물었다. "I'm not a Korean boy!"라고 했다.
그렇지만 초점은 Korean이 아니라 Boy에 있는건데...

 잠시 Vivek이 적당한 택시를 찾고 있는데, 어떤 꼬마가 태연하게 걸어와서 돈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꿰줴줴한 차림이었지만 꼬마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Vivek과 꼬마는 웃으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듯 했다.
꼬마한테 동전을 주고 Vivek은 공항에 올 때마다 만나는 꼬마인데, 정말 너무 재밌다고 말했다.
네팔어를 몰라서 내용은 전혀 모르겠지만 느낌상 상당히 재치있는 말을 잘 하는 꼬마인듯 했다.
그리고 Vivek역시 자기가 말해온대로 유머러스하고 농담을 즐기는 성격인듯 했다.

 원래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는데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온 Vivek은 아무래도 택시를 타야겠다며 택시를 잡았다.
그 당시에는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그 날 버스가 파업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네팔의 잦은 파업은 그 후 내 여행일정에도 상당히 차질을 주었다.

낡은 택시를 타고 나와 Vivek은 카트만두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 택시 안에서 내다 본 카트만두의 첫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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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기 ①


2월14일.
발렌타인 데이.

딱히 이 날이 반가울리 없는 나는 서둘러 우리나라를 탈출해야했다.
아침에 Vivek에게 문자가 왔다.
Happy Valentines이라는 인사와 함께, 지금 현재 카트만두에 비가 내려서 좀 쌀쌀하니
따뜻한 옷을 챙겨오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5시반에 공항 리무진을 타고 준비도 충분히 못한 채 허겁지겁 여행길에 올랐다.
수속을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황급히 챙겨넣었던 아이젠이 걸렸다.
뾰족한 물건을 기내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젠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던 나는
애원을 해보기도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다시 짐을 부치러 되돌아가야 했다.
서둘러 짐을 부치고 21시 비행기에 아슬아슬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방콕까지 상당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와인을 주문해 마신 후에 잠을 잤다.
와인의 도움으로 예전보다는 괴로움 없이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태국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나는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3번째 방문한 태국이지만, 작년부터 옛날의 돈무항 공항이 아닌
새롭게 수완나품 공항으로 비행기가 도착하기 때문에 걱정이 컸다.
문을 연지 얼마 안되느니만큼 공항 주변에 딱히 변변한 시설이 없는데다
공항 내 호텔은 가격이 거의 10만원에 이를만큼 비쌌기때문이다.
태국에서 10시간 정도를 머물러야 하는 나는 공항에서 그저 버틸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호텔을 찾아내서 숙박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다음날 네팔에서의 일정을 빡빡하게 세워놓았던 나는
여행 첫날부터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다소의 비용이 들더라도 호텔에 숙박할 것을 선택했다.

 

↑ 태국의 신공항인 수안나품 공항. 인천공항과 상당히 유사하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후끈했다.
3번째 만나는 태국의 공기였다.
공항 앞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태국 돈은 하나도 없고 달러와 원화만 있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어
택시 기사에게 달러로 얼마냐고 물었는데, 어이없을만큼 택시 기사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냥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러다 핸드폰을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영어를 할줄 아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한듯 했다.
힘들게 힘들게 제3자를 통해서 가격을 흥정했다.
350BATT.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심야였던데다 워낙 흥정에는 재능이 없기에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공항에서 약 30분 거리의 아바나호텔.
미리 네이버에서 검색해 저렴하면서도 깔끔하고 서비스가 좋다고 알아간 곳이었다.
아바나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2시가 다 되어있었다.
호텔 프론트에는 상당히 키 크고 잘생긴 청년이 체크인을 받았다.
이 청년 역시 어찌나 싱글싱글 웃어대는지 나까지 괜히 따라웃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외에 짐을 들고 따라오던 청년까지도 내내 나를 보고 방긋방긋 웃어서 과연 미소의 나라임을 실감케했다.

안타깝게도 방은 2인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호텔보다는 저렴했으므로 그대로 묵기로 했다.
다음날의 모닝콜을 부탁한 후, 방으로 올라가 그대로 뻗어버렸다.

 
 
↑Avana Hotel의 Twin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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