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기 ⑦



 

2007/2/18

 

 

  추위로 밤새 잠을 설치다 결국 또 이른 새벽에 잠이 깼다.

드디어 히말라야에 오르는 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산에 오를 짐을 모두 챙긴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입산허가서를 받으러 갔다.
여기에서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마음 먹은 Vivek은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전부 자기가 하려 애썼다.
직접 줄 서서 허가를 받고, 필요한 양식도 자기가 전부 작성했다.
나는 중간에 끼어서 내가 할 것임을 이야기했지만, Vivek은 말을 듣지 않았다.
혼자 여행은커녕 가이드보다도 더 착실하게 내 역할을 대신 하는 Vivek이 때로 고맙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에는 확실히 썩 기분좋지 않았다.
게다가 산에 들어가는 허가증 발급료로 무려 2000Rs나 내야 했다. (약 3만원)
우리나라에서의 입산료라고 해도 비싼 편인데 네팔의 물가가 우리보다 훨씬 낮은 걸 감안하면 상당한 바가지라는 것을
수 있다. 이 이후에도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운 입장료니 관광료가 줄줄이 이어졌다.

  Vivek 은 이어 아무런 설명 없이 트레킹 장비 대여점이라던가, 기타 필요한 곳을 끌고 다녀서
나는 상당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행 막바지 무렵 Vivek도 먼저 사과를 했다.)
결국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한 후, 우리는 큰 길가의 가게에서 토스트와 네팔차로 아침식사를 했다.
택시로 이제 히말라야의 입구를 향해 출발하는가 싶더니 Vivek은 또 잠시 시장에서 멈추었다.
상당히 만발의 준비를 하는듯 싶었다. Vivek은 택시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혼자 남겨진 나는
결국 택시에서 내려 마음대로 시장을 돌아다녔다.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한 과일 노점상의 아이들을 발견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학교에 가기 전이었다. 네팔의 학교는 오전 10~11시쯤에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귀여워 보여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Hi~" 한 명의 남자아이는 도망가 버리고 단아하게 교복을 입은 남매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중 오빠인 쪽이 'Hi~"하고 인사를 했다.
너무나 귀여워서 사진을 좀 찍어도 괜찮냐고 하니까 흔쾌히 "Yes" 라고 대답해 주었다.

 

↑ 너무 귀엽던 두 남매

 

나의 물음에는 주로 오빠쪽이 답했다.
나이나 무얼하고 있는가 등을 물어봤는데,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여자아이쪽은 영어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지 똑같은 질문에도 답이 계속 달라지는 등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가 어떤 말을 하던 계속 배시시 웃어주어 너무나 기쁜 마음이 들었다.
둘 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정말 너무 예뻤다.
네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좀 더 눈이 크고 짙으며, 코는 높은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목구비가 가장 밋밋한 것은 한.중.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시장에서 장을 다 본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나야풀(Naya Pul)로 출발했다.
바로 그 곳이 우리가 예정한 코스의 입산장소였다.
그곳은 포카라에서도 그다지 가깝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무려 2시간이나 더 가야했다.

산이 가까워지자 관리소가 나왔다.
어떤 아주머니가 관리소에서 허가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연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는 'So cute'라고 반복해 말해주었다. 외국인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Naya Pul 도착.

등산장비를 챙겨 택시에서 내렸다. 입구에는 시바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Vivek이 사제를 찾아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게 도와주었다.
 

↑ 시바신의 사원. 사원 안쪽에 시바 가족의 그림이 걸려 있다.

 

산으로 들어서는 입구인 다리를 건너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마을이 나왔기 때문에 줄곧 평지를 걸었다. 그런데 평지 위에서도 짐이 너무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었다.
앞뒤로 맨 짐때문에 나는 이리 뒤뚱 저리 뒤뚱 하며 간신히 걸었다. 마을은 도로같은 것이 전부 큰 돌로 정비되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되어 나는 나귀(Ass)를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Horse'라고 야단법석을 떨었건만,
Vivek은 저건 절대 horse가 아니고 그냥 Ass라며 무덤덤했다.

 


↑ 처음으로 만났던 Ass.
이 이후 지겹도록 많은 Ass들과 마주치게 된다.

 

마을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남아 있었는데, 주로 게임같은걸 하며 놀고 있었다.
게임이라고 해서 한국의 아이들이 하는 컴퓨터 게임같은 것이 아니라 손으로 치는 당구같은 것이었다.
Vivek은 네팔의 국민게임이라고 가르쳐줬다. 우리나라에서의 고스톱과 비슷한 대중성을 지닌듯 했다.

 

↑ 게임을 즐기는 네팔 아이들


 

우리는 곧 마을을 지나 트레킹 코스에 접어들었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어 사방은 고요했고,
이따금씩 물소리나 바람 소리만 귀에 스칠 뿐이었다. 우리는 말도 없이 묵묵히 걸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5도 안팎의 쌀쌀한 날씨에 추위를 느꼈었는데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땀이 났다.
나는 네 겹이나 껴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야 했다.

 

 

↑ 트레킹 코스

  

 
 
 
 

↑ 장작을 패는 아저씨

 

산에 오르며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내려오는 사람들, 혹은 우리와 같이 오르는 사람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두 손을 합장하고 '나마스떼 Namaste'라고 인사했다.

나와 Vivek은 걸음이 상당히 빠른 타입이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제쳤다.
둘 다 무분별하게 돌진한 다음 길게 쉬는 타입이었다. 이 때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을 우리가 꼭대기에 오르는 3일 동안
내내 만나게 된다. 특히 그 중에서 우리와 같이 여자, 남자 둘이 오르고 있는 팀을 자주 만났는데 그 팀은 우리와는 성향이
달랐다. 우리가 마구 돌진해 오른다음 오래오래 쉬고 있는 반면, 그 팀은 매우 천천히 걷고 거의 쉬지 않았다.
덕분에 서로 사이좋게 반복해 지나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인사에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더욱이 팀의 구성원이 비슷하다는 점도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주로 외국인+네팔인의 구성은 관광객+포터(짐을 지는 사람)의 케이스가 많다.
그런데 오로지 그 팀만 유일하게 Vivek과 나처럼 친구끼리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여자쪽은 Yenina라는 이름으로
핀란드 사람이었고, 남자는 Niraj라는 이름의 네팔인이었다.

 

따가운 햇볕과 끊임없이 계속되는 오르막길로 거의 녹초가 될 무렵 작은 식당이 하나 나타났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산에 오르는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보았던 Yenina와 Niraj였다. Niraj가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바로 옆테이블에 앉았다.
Niraj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31살 남자로 상당히 박학다식하였다.
Vivek의 말로는 네팔의 여러 카스트들 중에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카스트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 카스트들 중에는 많은 비율이
부자라고 했다. Niraj도 집안도 꽤 부유한 편인지 그의 이력은 상당했다. 네팔에서 교육은 마친 후, 독일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그 후 중국에서도 4년간 유학했다. 직물을 전공했는데, 현재는 중국 내에서 직물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그는 네팔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아 얘기 도중 지나가는 독일 사람, 미국 혹은 영국인,
네팔 사람, 중국 사람에게 제각기 말을 건넸다. 더구나 중국에 오래 살았던 탓인지 중국과 가까운 한국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많아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간단한 한국말도 할 줄 아는데다 김치나 기타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현재 한국인들이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중국 젊은이들이 한국의 연예인을 상당히 좋아하며
한국의 여자들을 미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여자들처럼 예뻐지고 싶은 많은 중국 여자들이 한국 화장품을 산다고 이야기했다.
한류라는건 언론에서 부풀린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인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네팔과 Niraj의 네팔어 대화가 오래 계속되자 지겨워진 나는 식당 근처의 샘물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들에게 물을 뿌리고 장난을 치며 좀 놀았다. 아이들이 하는 말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왁자지껄한 것은
한국 아이들이나 네팔 아이들이나 똑같았다.

 


 

식당에서는 네팔의 계단식 밭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는데, 산지에는 주로 계단식 논밭을 이용한다고 배웠던 먼 옛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밭 위에는 소똥이 군데군데 놓여있었는데, 아마 거름으로 쓰려는 것 같았다.

 

↑ 계단식 밭

 

 

음식은 주문한 지 30분이 넘어서야 겨우 나왔다. 우리나라 같으면 가게에 항의하고 난리가 났겠지만,
네팔 사람들은 시간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듯 모두 여유로웠다. 네팔의 음식 달 바트 타카리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트레킹에 나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산길이 아니라 돌계단으로 코스가 바뀌어 있었다.
산길에 비해 걷기 편했기 때문에 나는 잘됐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이 돌길의 끝에 우리의 목적지인 울레리(Ulleri)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생각보다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잠깐 정도야 오를 수 있겠지만 몇 시간 내내 계단만 오르고 있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중간 중간 자주 쉬어야만 했다.

 

↑ 난간에 매달려 휴식을 취하는 Vivek

 





↑ 잠시 휴식중...


 

끊임없는 계단을 오르는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친구끼리 네팔에 온 두 중국인, 영국 단체 관광객, 고산병으로 거의 쓰러질 것 같던 중국 여대생(Vivek이 더 이상 올라가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Yenina와 Niraj 등. 모두 포터를 고용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도 Vivek만 없었더라면 포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도 어린 내가 네팔의 나이 많은 아저씨를 포터로 쓰는 모습을 Vivek이 보면 기분 나쁠 것 같아 짐을 모두 내가 지고
올랐다. 그러나 점점 죽을 지경이었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턱턱 막혔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휴식의 주기가 빨라졌다.
앞뒤로 하나씩 맨 가방이 점점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사진을 찍는 Vivek(左)과 중국인 일행들(右)
그리고 혼자 계속 앞서가던 영국 소년(中, 다리 위)

 


계속 마주치면서 중국인 일행단과도 친해졌다. 그 중에서 계속 뒤쳐지던 남자와 좀 친해졌다.
그는 Vivek을 나의 포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Vivek도 설명하기 귀찮아졌는지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는 내가 혼자 네팔을 찾은 것에 감탄하고, 또 성큼성큼 산을 오르는 체력에도 감탄했다. 계속 나에게 'A Strong girl'을
연발했다. 딱히 등산 준비를 해 오지 않은 나는 동네에서 신던 운동화를 신고 대강대강 산을 오른 반면, 그는 만반의 등산준비를
해 온 상태였다. 그런데도 내가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산을 오르자 계속 감탄을 했다. 그는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나중에
Vivek은 그가 나에게 말을 거는 내내 상당히 shy해 보였다며 계속 놀렸다. 그는 나에게 등산 스틱을 주고 싶어했지만,
왠지 번거로울 것 같아 거절했다. 중간 쉬는 시간에 우리는 서로 싸 온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그와 대화하는 게 상당히 편하게 느껴져 나는 그를 기다리주며 걸었지만,
그가 점점 지쳐가자 어쩔 수 없이 먼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기 직전 그는 자신의 이름과 메일 주소를 가르쳐주며
연락하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Nick이었다.

 

 

↑ 풀을 뜯고 있던 산양들.
바위틈 구석을 '메에'하고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풀을 뜯었다.


 

Nick과 헤어진 후 Vivek과 나는 더욱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왠지 조금만 더 가면 Ulleri에 도착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계속 분발하려 애썼다.
그러나 몇 시간을 가도가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계단은 정말 절망스러웠다. 처음에는 즐겁게 오르던 나도, 중간쯤에는
힘들지만 분발하던 나도 모두 사라지고 거의 의식 없이 습관처럼 다리를 들었다 내려놓는 나만 남게 되었다.
거의 6시간이 넘게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더 이상 계단을 오른다는 느낌이 없었다.
다리는 자동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내려가는 것은 중력에 의해 쉽게 가능하지만 다리를 위로 올리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더욱이 짐은 어깨를 너무 짓눌러 어깨가 곧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바지에는 발톱이 마구 흔들려 곧 빠질 것 같았다.
발끝이 아프고, 운동화에 긁힌 발목에서는 피가 났다. 등산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땀이 많이 나고 열도 많이 나서 머리도 굉장히 어지러웠다.

 


 

 나는 Vivek에게 이 곳을 'The everlasting stair'이라고 부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여자들은 작은 핸드백 같은 것만 들고 가볍게 산을 오르는 영국인 일행을 볼 때면 '나도 Vivek만 아니었다면 저렇게
산을 오를 수 있는건데...' 하는 어리석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들은 여러 명의 포터와 가이드를 고용해 매우 편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등산장비도 완벽한데다 양산을 쓸 여유까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듯 힘들어서 엉뚱한 곳에 화살을 날렸던 것 같다.

 

 

한참 힘이 빠지고, 정신이 없을 무렵 돌계단 입구에서 작은 여자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나에게 두 손을 모아 'Namaste'라고 인사를 하더니 왠 크고 붉은 꽃을 주며 'Welcome'이라고 말했다.
Vivek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네팔의 국화였다. 갑자기 힘들던 마음이 싸악 가시면서 너무 기뻤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가방을 온통 헤집어 사탕을 찾아냈다. 답례로 사탕을 주자 아이가 방긋 웃었다.

 

 

↑ 아이가 준 네팔의 빨간 국화(國花)를 들고...

 

갑자기 Vivek은 나에게 꽃을 머리에 꽂을 것을 요구했다.
빨간꽃을 머리에 꽂으라니....
나는 Vivek에게 한국에서 머리에 꽃을 꽂는건 crazy girl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Vivek은 크게 놀라며 네팔에서는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고백할 때 머리에 꽃을 꽂아준다고 했다.
어째서 아름다운 꽃을 꽂는 것이 미친 사람의 행위냐고 의아해했다.
딱히 설명할 방도가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튼 Vivek의 끈질긴 요구로 머리에 꽂긴 했으나, 지금 내가 봐도 역시 광년이로 보이니 사진은 생략.

습관화된 문화란 상당히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잠시 느꼈다.

  

↑ 산 꼭대기에 홀로 서 있던 집.

"대체 정체가 뭐냐!"
아기를 재우는 요람이 천정에 매달려있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초가집)과 상당히 유사했다.


 

한참을 오르던 중 우리는 산사태의 현장과 마주하게 되었다.
Vivek은 히말라야는 산사태가 잦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신기한 것은 무너진 흙 사이에 삼지창이 하나 꽂혀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Vivek은 바로 시바신의 무기라고 이야기했다.
산사태를 시바신의 벌이라고 여기는 네팔인은 산사태가 난 곳에 시바신의 무기를 꽂아두어 다시는 산사태가 그 곳을 찾지 않게
해 달라는 바람을 표시한다고 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었는데 너무 오래 되어 세밀하게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 산사태의 흔적


↑ 시바신의 삼지창

 

 시간은 어느덧 늦어지고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건만 아직도 Ulleri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끝날듯 끝날듯 보이는 계단도 역시나 그 이름마냥 끝없이 이어졌다.
이 구비를 돌면 끝이 나오겠거니, 저 구비를 돌면 끝이 나오겠거니..
마냥 허망한 기대를 하며 힘을 내보지만, 돌아오는건 새로운 계단의 행렬 뿐이었다. 거의 막바지 무렵에는 너무 힘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 못할만큼 너무 힘들었다. 내 다리 하나 천근처럼 느껴진다는
그 말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천근이란 이런 무게구나.' 싶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발은 피투성이, 어깨는 짓무르고 완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Vivek은 나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청난 속도로 계속 산을 올랐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갔다. 우리가 이제까지 만났던 일행들은 모두 뒤쳐져 버렸다.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우리를 따라온 것은 일행 중 가장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영국인 소년 뿐이었다.
오로지 그 소년만이 우리와 비슷한 속력으로 산을 올랐다.
그는 주근깨가 얼굴에 나고, 얼굴이 말처럼 길죽했는데 나와 Vivek이 신기했는지 끊임없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Vivek은 내가 너무 지쳐 대화가 불가능해지자 심심했는지 그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둘은 대화를 하며 올라가고, 나는 내가 살아있는걸까 하는 물음에 홀로 답하며 계속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아픔도, 의식도 모두 초월한 기분.

마치 신선이 된듯 초탈한 기분이 든 바로 그 때!

Ulleri가 눈에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산을 오른지 약 10시간이 될 무렵이었다. 나는 거의 10 시간 가까이 계단만 오른 것이었다.
(물론 약간 뻥. 처음엔 약간 평지도 있었고, 점심도 한 시간 넘게 먹었다.)

 

Vivek은 조건좋은 롯지(Lodge)를 고르려 했으나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으므로 아무데나 상관없었다.
우리는 가까운 롯지에 드디어 짐을 풀었다. 온몸이 쓰리고 아팠다.
근육통이 장난 아니었다. 이대로 일주일간 어찌 트레킹을 할런지 눈앞이 캄캄했다.

 

1인실이 모두 찼으므로 우리 모두 각각 2인실을 잡았다. 2인실임에도 불구하고 1박에 천원밖에 안할 정도로 매우 쌌다.
이 정도 물가의 네팔에서 입산 허가증을 얼마나 비싸게 팔았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방은 거의 나무와 다름없이 딱딱한 침대 두 개와 어설픈 그림 하나, 그리고 커텐이 달려있었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이 날 머문 이 롯지가 내가 트레킹 하는 내내 묵었던 그 어떤 롯지중에 가장 호화스럽고 좋은 롯지였다.

 

↑ 정말 낡고 보잘것 없는 곳이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보니 그럴듯해 보여 억울하다!

 

창은 굉장히 얇디얇은 유리 한 겹이었는데 그나마도 창틀과 아귀가 맞지 않아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정도의 틈이 있었다. 더욱이 당연하게도 이 방 이외에 부대시설은 거의 없었다.
샤워시설은 커녕 굉장히 지저분하고 어둡고 좁은 세면대가 하나 화장실 앞 복도에 있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이 이후의 롯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대강 짐을 풀고 쓰러져 눕고 싶었으나 Vivek은 아직도 기운이 나는지 내 방으로 놀러왔다. 그는 9시가 넘을 때까지 혼자 수다를
떨었다. 나는 너무 지쳐 거의 듣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의 수다가 너무 재밌어서 계속 웃었다. 주로 네팔의 다양한 카스트에 대한
이야기었는데, 너무나 다양한 문화를 가진 카스트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움직이기 귀찮았던 우리는 양파 수프를 방으로
주문해 같이 저녁으로 먹었다.

 
9시가 넘자 Vivek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바로 내 옆방이었는데 굉장히 얇은 벽 사이로 돌아간 지 5분도 안되어 Vivek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몹시 피곤한 것과는 달리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온몸은 녹초이고 분명히 잠이 필요한데도 잠이 오지 않아 밤새 괴로워했다.
게다가 밤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추위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자다말고 내가 가진 모든 옷을 전부 꺼내 껴입었지만 그래도 추위를 이겨낼 수 없었다.

 

히말라야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처절한 추위와 함께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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