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기 ②


어제 미리 부탁해놓은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잠에서 깼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태국의 아침

 


샤워를 마치고나니 모닝콜이 울렸다.
간단하게 짐을 정리한 후,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호텔 부페에는 나 이외에도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타이 항공 기내식은 항상 양이 많음을 알기에 가볍게 과일 위주로 아침식사를 했다.
태국의 열대과일은 여전히 맛있었다.

 호텔 프론트에 택시를 부탁하고, 짐을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서양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나에게 공항까지 택시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어제밤에 350BATT를 냈다고 하니 혀를 내두르며 놀랐다. 내가 심하게 바가지를 쓴건가 싶어서 슬슬 불안해졌다.
아침에는 러시아워가 없다는 호텔 직원의 말에 여유를 가지고 출발했는데,
정말로 뻥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서 금방 신공항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의 택시비는 195BATT. 어제의 반값이었다. ㅜㅠ

 공항 앞에는 경찰들이 커다란 경찰견과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화약 냄새를 맡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딱히 죄 지은 게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긴장되었다. 왠지 그 큰 개가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보딩 패스 후, 공항세를 냈는데 무려 700BATT나 했다.
너무 비쌌다.

 시간에 여유가 많았으므로 천천히 신공항을 구경하며 게이트로 이동했다.
게이트 앞에는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앞에는 죄다 한국인이었었는데,
네팔 가는 비행기 앞 게이트에는 한국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날 뿐 아니라 네팔에 있는 내내 단 한번도 한국인을 보지 못하는 기현상이 이어졌다.
해외에 여러 번 가보았지만, 한국인이 이렇게까지 없는 곳은 처음 보았다.)
게이트 앞에는 얇은 숄을 두른 여자들과 특유의 모자를 쓴 검은 피부의 네팔 남자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 모두 나를 자꾸만 쳐다보았다. 그 외에는 50대 가량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있었다.

 나는 혼자 의자에 앉아서 Lonely Planet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여행 직전까지 연수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분히 Lonely Planet을 읽고있자니 오히려 걱정이 늘었다. 조금 불안해졌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

그러나 Oh, my!
내 앞, 뒤, 옆, 대각선 자리가 모두 네팔 남자들이었다.
까만 피부에 큰 눈을 꿈뻑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데다 특유의 독특한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9칸짜리 정사각형 숫자칸에서 나는 5의 위치에 앉고, 나머지 숫자칸에 모두 네팔 남자들이 앉아있는 형상이었다.
게다가 나를 제외한 그들 모두가 한 일행이었다.
어째서 네팔 단체 일행 한가운데 내 좌석이 끼게 된건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보딩 패스를 할 때 잠깐 혼선을 빚은건가...

 아무튼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과자를 나누어주고, 조금 후에는 기내식을 나누어주었다.
서울에서 태국을 갈 때의 메뉴는 Beef와 Chicken이었는데, 태국에서 네팔갈 때의 메뉴는 Mutton과 Chicken이었다.
아마도 특정 종교인의 비율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리라.
뭐, 나는 언제나 Chicken이니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다시 헤드폰을 끼고 잠을 청하려는데, 내 오른쪽에 앉은 네팔인이 말을 걸었다.

"Hello, Where are you from?"

 그는 일행 중 가장 어려보이는 청년이었다. 마침 비행이 슬슬 지루해지고 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얻은 그는 여러 가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나는 단 한마디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이 네팔어인지 영어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만큼 그의 억양은 강했다.
나는 당황해서 몇 번이나 되물었고 그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결국은 수첩과 펜을 주고 필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는 당황하며 계속 말을 반복할 뿐 좀처럼 무언가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계속된 요구에 뭔가를 끄적이긴 했지만 그가 하고 있는 말 전체가 아닌 한두 단어만을 적을 뿐이었다.
나는 'Full Sentences'를 요구했지만, 그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결국 남은 비행 시간 내내 우리는 대화를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1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한 말의 거의
대부분은 'Excuse me?'나 'Sorry?'였다.

 별다른 걱정 없이 출발한 나였지만 그와 대화하면서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Vivek의 영어가 매우 훌륭해서 모든 네팔사람들이 그 정도의 영어는 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모두 비행기에서 만난
청년과 같다면 혼자 여행이 가능할까 싶었다. 슬슬 걱정과 불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네팔에 거의 다 와가는데...
게다가 문득 Vivek이 네팔인은 영어를 학교와 공적기관에서 쓰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말할 일은 없기 때문에
Speaking에 약하고 발음도 좋지 않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Vivek과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튼 그래도 어렵사리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Ram Kumar Lama였다. 나보다 두 살 어렸고, 누나가 하나 있다고 했다.
나도 남동생이 있다고 했더니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그때부터 자꾸 나를 'Sister Le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여권에 끼워진 내 사진을 보더니 자꾸만 사진을 달라고 졸랐다. 하나만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비자를 받기 위해 준비해 온 사진을 그에게 줄 수는 없었다. 그 사진은 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나름대로 설명했지만,
잘 통하지 않은건지 그는 계속 사진을 갖고 싶다고 우겼다. 나중에는 비자를 발급받고 나서 달라는 얘기를 했다.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해져버렸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그는 자기가 먼저 내려서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다고 하고는 나가버렸다.
나는 최대한 그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나갔다.
사진을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비행기에서 만난 친구 Ram


 

그러나 나는 그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곧 알았다.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줄이 굉장히 긴데다가 비자 발급이 굉장히 느렸던 것이다.
나는 무거운 짐을 들고 계속해서 기다려야했다. 중간에 환전도 했지만 좀처럼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시간이 40분을 넘어가면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비행기 도착시간도 예정보다 상당히 늦어져있었던 것이다.
출발 전에 이상할만큼 Vivek과 연락이 잘되지 않아서 충분히 사전에 얘기를 나누지 못했었다.
Vivek은 공항에 마중나오려 했고, 나는 나 혼자 카트만두까지 가서 연락할테니 카트만두에서 기다리라고 mail을 보냈었다.
그리고는 답을 받을 여유도 없이 곧바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Vivek이 나올지, 안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미 상당한 시간을 기다렸을 터였다.

 간신히 비자를 다 받고나니 이미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서둘러 나왔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 시간동안 비자를 받고 서 있었는데, 아직도 짐이 다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닌가!
나는 역시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짐까지 가지고 모든 절차를 다 마치고 났을 때는 이미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드디어 네팔 땅에 정식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네팔의 국제항 Tribhuvan Airport.
국제항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매우 작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공항 밖을 나오자마자 나는 몰려드는 검은 사람들에 깜짝 놀랐다.
까만 피부의 남자들이 모두 일제히 몰려들어 왁자지껄 떠드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택시 기사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 모두의 발음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서의 Ram과 비슷한 강한 발음이었다.
갑자기 왈칵 겁이 났다. 여행을 결심한 이후로 처음으로 무서웠다.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어쩔줄 몰라했다.

 "I don't need a taxi now."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 때였다.

무슨 네팔어가 들리면서 그 사람들을 헤치고 내 앞에 누군가가 쓰윽 다가와 섰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Hello, How are you?"

 바로 나의 친구 Vivek이었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무서움이 사라졌다. Vivek이 나타나자 내 주변에 바글바글하던 검은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 정말 놀라운 기분이었다.
6년 넘게, 그리고 횟수로는 7년째 펜팔? 아니 e-pal로서 지내왔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실 직접 만날 것을 기대해본 적도 없었다.
Vivek은 이제껏 봐 온 사진덕분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지만, 사진보다는 훨씬 나은 얼굴이었다.
다른 네팔인들은 다 그 얼굴이 그 얼굴로 똑같이 보이는데 Vivek만은 전혀 다르게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거기다가 특유의 몸 냄새가 나지 않고, 좋은 향이 났다. 향수같은 것이 아니라 뭔가 은은하고 수수한 향이었다.

Vivek은 나에게 저쪽으로 잠시 걷자고 불러냈다.
우리나라 공항 주변은 도로 뿐인데, 네팔의 공항 주변은 온통 풀들이었다. 그리고 어딜 둘러보아도 온통 산이 보였다.
카트만두는 분지이기 때문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과 우리나라와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높은 산들이
경이롭게 보였다. 햇볕이 맑은데, 은근히 쌀쌀하긴 했다.

 우리는 잠시 산책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너무나 다행인 것은 Vivek의 발음은 굉장히 깨끗하고 명확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비행기에서 만난 소년의 이야기를 하며 Vivek의 발음 역시 그럴까봐 걱정했는데 발음이 좋다고 칭찬하자
Vivek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I'm a teacher"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회사일로 싱가폴 사람들을 안내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싱가폴 사람들의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했다.
Vivek은 나 역시 그런 영어를 할까봐 무척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말하는 영어가 clear해서 알아듣기 쉽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Vivek이 물은 것은 내 이름을 도대체 어떻게 발음하느냐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내 이름 스펠을 'Jihye'로 썼었다.
솔직히 지금에서야 생각하건데, 외국인이 저 이름 스펠을 보고 '지혜'라는 발음을 할리는 절대 없을 것이다.
여권에는 스펠이 'Jeehae'라고 되어있는데, 이쪽이 좀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항상 나를 Jihye로 불렀던 Vivek은 가끔씩 내 이름 발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해왔었던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발음해주자 굉장히 좋아하며 따라했다.
나 역시 Vivek이 '비벡'인지 '비베크'인지 헷갈렸었는데, 다행히 내가 수년간 생각해왔던 '비벡'쪽이 맞는 발음이었다.

 몇 가지 대화를 나누고나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나는 굉장히 부끄러웠고 낯을 가리고 있었다.
7년째 친구라고는 하지만 얼굴을 처음 보는데다, 상대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줄곧 Vivek이 대화를 이끌어야 했다.
네팔 여행 초반 내내 내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Vivek은 내가 걱정됐었다고 얘기해주었다.
내가 너무 Shy해서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가 예전에 나는  Korean boy들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었었는데 그것을 용케 기억하고는
어째서 부끄러워 하느냐고 되물었다. "I'm not a Korean boy!"라고 했다.
그렇지만 초점은 Korean이 아니라 Boy에 있는건데...

 잠시 Vivek이 적당한 택시를 찾고 있는데, 어떤 꼬마가 태연하게 걸어와서 돈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꿰줴줴한 차림이었지만 꼬마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Vivek과 꼬마는 웃으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듯 했다.
꼬마한테 동전을 주고 Vivek은 공항에 올 때마다 만나는 꼬마인데, 정말 너무 재밌다고 말했다.
네팔어를 몰라서 내용은 전혀 모르겠지만 느낌상 상당히 재치있는 말을 잘 하는 꼬마인듯 했다.
그리고 Vivek역시 자기가 말해온대로 유머러스하고 농담을 즐기는 성격인듯 했다.

 원래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는데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온 Vivek은 아무래도 택시를 타야겠다며 택시를 잡았다.
그 당시에는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그 날 버스가 파업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네팔의 잦은 파업은 그 후 내 여행일정에도 상당히 차질을 주었다.

낡은 택시를 타고 나와 Vivek은 카트만두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 택시 안에서 내다 본 카트만두의 첫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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