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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4 파피용
  2. 2009.05.04 참말로 좋은 날
  3. 2009.05.04 소유
  4. 2009.05.04 연을 쫓는 아이
  5. 2009.05.04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6. 2009.05.04 고하토
  7. 2009.05.04 그녀가 죽었다
  8. 2009.05.04 내 심장을 향해 쏴라
  9. 2009.05.04 독학자
  10. 2009.05.04 1984년

파피용


파피용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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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읽은지 꽤 되었다. 고등학생때 '개미'를 처음 접하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다. 기발한 상상력과 내용 전개에 흥미를 붙여 당시 나왔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모두 삽시간에 삼켜버렸지만, 한꺼번에 과식을 한 탓인지 뒤로 갈수록 신선도가 떨어져 곧 흥미를 잃고 말았다. 덕분에 오랜만에 읽은 그의 글은 요즘 잊고 지내던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센세이셔널하게 다시 한 번 불러일으켰다. 또 다른 지구를 찾아 헤매는 인류의 천 년에 걸친 여정. 그 끝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어찌보면 절망적인 그러나 또 다른 탄생으로 희망을 예고하는 그런 글이었던 것 같다.

그의 책답게 지루할 틈 없이 삽시간에 읽어내려갈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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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참말로 좋은 날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성석제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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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은 서너권 읽었던 것 같다. 그의 책을 고른 데에 딱히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작가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을 뿐...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꾼이라 부른다. 그렇다. 그는 정말 이야기꾼이다. 가마솥에 누룽지를 박박 긁어먹듯, 열기가 남은 화톳불에 감자를 구워먹듯 구수한 이야기를 능란하게 해내는 인기 이야기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서너권을 구별없이 주워 삼키는 동안 내가 특별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독특한 그의 문체에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옛날 이야기 들려주듯 어르고, 달래고, 추임새가 있는 그런 문체. 어린 시절 엄마가 해 주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같은 이야기.
그러나 결코 내용은 그렇지 않은 이야기. 나는 낯을 무척 가리기에 그런 문체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랏' 하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 어느 순간 푹 빠져들었다. 예전의 책과 마찬가지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끔하고 매끄러운 문장 구성력하며 입담은 그대로인데 그의 무엇인가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해학적이고 우습던 그의 이야기는 어디로 간 것인가! 제목은 '참말로 좋은 날'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때로 읽는 이를 공통으로 기운빠지게 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다. 가장이 자신의 아들, 딸,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한다던가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류의 기사이다. 그런 기사를 접할 때면 나는 도대체 무슨 억한 이유가 있길래 그렇게 상상도 할 수 없이 참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 그런데 그렇듯 참혹하고 상상도 안되는 사건들이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 생생히 재연되고 있었다. 그 특유의 맛깔나던 입담이 옛날 이야기가 아닌 현대의 비극을 이야기할 때 얼마만큼 적나라하고 안타까운 소설이 탄생하는지 확인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들. 아둥바둥해도 제 자리, 아니 제 자리도 못 지키는 사람들이 눈 앞에 살아 숨쉬고 있는듯하여 소설 하나, 하나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쉬어야 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눈을 감아도 한참동안 그 잔상이 가시질 않듯, 눈을 감아도 소설의 잔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나는 문득 모든 것을 잊고 잠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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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소유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A.S 바이어트 (미래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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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시인의 로망스를 추적해나가는 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아내와 삶에 성실하다고 알려진 랜돌프 핸리 애쉬의 메모를 가난한 학자가 발견하고, 이를 추적해 나가며 숨겨졌던 그의 사랑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100여년 전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애쉬와 크리스타벨과 같이 그 뒤를 쫓는 롤래드와 모드 역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잘 짜여져 있고, 문체가 아름다우며 매우 사실적이다. 서로 소유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가. 바이어트가 소설에서 제시하는 이러한 사랑법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과거의 두 시인, 또 두 시인의 자취를 쫓는 현대의 학자, 그 학자들을 쫓는 다양한 학계의 인물들 등..

추적에 추적이 꼬리를 잇는 형상은 일종의 긴박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소설의 결말에 대한 기대를 모은다. 더욱이 간간이 소설에 알맞게 간을 쳐주는 과거와 현재의 두 로맨스는 소설의 풍미를 더욱 깊게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라 하면,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두 시인의 시에 대해서만큼은 도무지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시'라 하는 것은 지극히 언어적이다. 함축적 어휘와 리듬감의 절묘한 조화가 시를 감동적으로 만드는 장치인데 그 세심하고 예민한 장치는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작동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로 나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시인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받게 마련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경우 아무리 유명한 시인의 시라 할지라도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한다. 한때 랭보의 시가 뿜어내는 독특한 분위기,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단어 선정에 흠뻑 빠져 그의 시집을 산 적이 있었지만, 그의 시 만큼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나는 시를 제대로 읽고 싶어, 그의 전기를 읽었지만 결국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삶이지, 시가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잘못 생각했던 점이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을 알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를 이해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 책의 역자가 훌륭하게 애써서 번역을 했다 할지라도, '시'라는 것은 다른 언어로 바뀌어 버리는 순간 온몸에 흠뻑 머금고 있던 축축한 매력이 모두 말라버리고, 물기 한 점 없이 따가운 태양 아래 바싹 말라, 만지면 부스러질듯한 어설픈 형체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시'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원래의 시를 쓴 작가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역량이 필요하리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신화와 요정, 삶과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 시인들의 시는 내게 있어 그저 아름답게 치장된 액자에 불과했다. 결코 그림 자체에 속하지 못한 채, 그저 그림을 그럴듯하게 장식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소유'의 가장 가치있을 그 부분들이 말이다.

키츠니, 엘리엇이니 이름난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머리 전반을 지배하던 지루함이나 일본의 하이쿠를 읽을 때 드는 어처구니없음이 각국 언어에 대한 나의 무지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러나 시를 그저 장식이나 도구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나에게 몇 번이나 '랜돌프 핸리 애쉬'를 실제하는 시인으로 착각케할만큼 생생한 상황을 꾸려나간 스토리와 솜씨좋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문학적이고 탐구적인 분위기 역시 섣부르지 않고 정제된 문체와 더불어 나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주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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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연을 쫓는 아이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할레드 호세이니 (열림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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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오후의 골목길 어귀.
한 아이가 골목길 모퉁이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어두운 안쪽을 살피고 있다.
아이는 짧은 반바지에 줄무늬 반팔셔츠를 입고 있으며 왼손은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벽면을 짚고 있다.
아이의 귀는 쫑긋하게 솟아있고, 검게 그을린 뒷목과 팔, 다리가 햇살을 받아 윤이 나듯 빛나고 있다.
맨 발에 신은 하얀 운동화에서부터 길게 뻗은 검은 그림자가 벽면에 길게 드리워
마치 아이와 한 몸이 된듯 바싹 붙어있다.

'연을 쫓는 아이'란 2005년판 책을 보면 위와 같은 표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한낮에 골목길 모퉁이에 서 있는 아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표지의 이 그림은 그러나,
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인이 쓴 최초의 영문 소설이라고 한다.
부시에 의해 '惡'으로 만천하에 규정되었으며, 전세계를 적, 또는 지원자로 두고있는 나라.
뉴스에서 심심치않게 그 이름을 들으면서도 결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 나라이다.

             '석유, 탈레반, 전쟁, 이슬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나의 스키마(schema)는 위와 같은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리라. 
  그러나 이 책을 아프가니스탄인의 현실과 비참함을 고발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한 소년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방황, 도피, 속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책의 뒷머리에 역자인 이미선 씨는  '이 소설에서 성장소설의 모티프가 씨줄이라면 날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전통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탁월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우연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 고통을 겪게 되고 그 고통을 통해 성장하며,
나아가서는 속죄할 기회를 얻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와 전통, 역사가 없이는 이렇게 빛이 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마치 천의 씨줄과 날줄처럼 균형을 잘 잡은 채, 한 소년의 성장기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배경을
맛깔나게 잘 버무려냈다.

  하산과의 어린 시절의 추억들, 예상치 못한 우연한 사건, 달라진 관계, 두려움, 도피, 일시적 평화,
속죄의 기회, 용기, 속죄와 평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내용들이 때로는 따뜻한 감정을,
때로는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며 물 흐르듯 이어진다.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에 방문하기도 하고, 인생의 중반기에 혹은 황혼기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그 중요한 갈림길은 그러나, 연극의 대단원처럼 웅장한 배경음악을 깔고,
전주곡을 울리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어느날 우연히, 그것이 평생에 걸쳐 나를 지배하게 되리라는
예상조차 하기 힘들만큼 짧게 또 순식간에 나를 찾아왔다 금새 사라져버린다.

  연 날리던 날, 골목길에서의 망설임을 평생 후회하고 고통스러워 하던 아미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을 평생에 걸쳐 속죄해야만 했던 바바.
아미르는 항상 아버지인 바바를 거인처럼 느끼고, 경외하였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얻으려 애썼으며, 종국에는 역시 친구이자 형제였던 하산을 버렸고,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 바바를 닮지
않았다고 괴로워했으며, 바바가 그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밝혀지는 비밀 속에 사실은 아미르와 바바가 무언가를 '훔쳤다'는 데에서,
또 나의 표현으로 하자면 '자신이 한 선택을 평생 후회한다'는 데에서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하나의 사건을 평생에 걸쳐 갚아나가려는 진지한 삶의 태도에서도 그들은 너무나 닮아 있다.

  '사람은 고통을 통하여 성장한다'고들 한다.
자신을 위주로 하여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어린 시절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하고
때로는 그 행복이 언제나 이어지는듯 착각하여 그것을 당연하게, 또는 지루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없이도 혹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장난으로 거대한 고통과 마주하게 대고,
더 이상 내 편이 아닌 세상과 대항하여 그 고통을 극복하는 노력과 과정 속에서 어느새 번데기가 허물 벗듯
하나씩 하나씩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이 이야기가 그 배경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하고 있지만,
전 세계에서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장소와 시간에 관계 없이
모두가 한번쯤 겪어야 하는 일이며, 모두의 기억 속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때로 내가 후회하는 기억들을 떠올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없던 일로 해버렸던 선택. 평생에 걸쳐 나를 괴롭게 하면서도 그것에 대항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기억에서 지우려고만 했던 것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사라진듯 사라진듯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나의 평생을 옭죄는 사슬로 변해버렸을 뿐이다.

 도피는 극복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도망과 망각으로 고통을 잊으려 했던 아미르가 두려움을 마침내 이겨내고,
마침내 그 기억과 당당하게 마주섰을 때의 클라이막스에서 큰 감동과 희열이 느껴지는 것은 나도 모르게
아미르의 모습에 나를 투영해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오랜 세월에 걸쳐 넘어서지 못했던 하나의 벽을 넘어선 아미르.
그의 앞에는 앞으로도 많은 선택의 기로가 있을 것이고,
때로는 또 다시 도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벽을 넘어선 그라면 앞으로 이어질 벽 앞에서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것이라 기대한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자신 앞에 마주선 아미르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 이야기의 대단원이며 처음 어린 시절의 추억과 또 가장 핵심인
사건과 동심원 구조로 이어지는 연 날리는 장면이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차가운 겨울 바람을 이기고, 손가락 끝을 온통 베어가며 연을 날리는 아미르와 하산.
머리 속에 그 장면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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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해경 (문학동네,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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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해마지않는 문학동네소설상의 8회 당선작이다.
제1회 수상작인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부터 줄곧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문학동네 소설상 당선작임을 알자마자 망설임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실수였던걸까?
의외로 이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영상에 빠져 활자를 소홀히 한 책임을 고려하고서라도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책장이 힘겨웠다.
이 소설은 조금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어릴적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두 개의 거울이 마주보고 있는 장면.
거울은 거울을 비추고, 거울 속 거울은 또 거울을 비춘다.
거울 속 거울 속 거울은 거울을 비추고,
거울 속 거울 속 거울 속 거울은 거울을 비춘다.
무한히 반복되는 거울의 그림자.

뭐, 무한히 반복되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 하나의 장면이 자꾸만 생각의 주변을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소설 속 소설. 소설 속 소설의 소설.
반복되는 소설의 내용.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소설을 쓰기로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한 자도 소설을 쓰지 못하는 동안 주변의 많은 이들이 소설을 쓴다.
주인공의 아내, 그녀, L씨, 고등학교 선생님, M군 등.
특히 주가 되는 것은 바로 그녀의 소설인데,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또 다른 '그녀' 역시 소설을 쓴다.
특이한 소재의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뒤의 심사평을 읽으니 이러한 재료를 가지고 소설을 쓴 것이
이해경씨 말고도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이야깃거리는 아니랄까.
더욱이 이 소설쓰기의 소설은 각각 등장인물의 익명성으로 인해 혼란을 가중시킨다.

 근자에는 소설쓰기란, 혹은 글쓰기란 과거에 비해 대중화되었다고 할까.
인터넷이나 블로그 등의 발달로 대중 속 개인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가 쉬워졌기에
우리는 잠깐의 검색으로 아마추어 작가들의 다양한 글들을 쉽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신작 소설들이 서점을 가득 메우고,
이제는 소설가 뿐 아니라 방송인에서부터 사업가까지 누구나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소설쓰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단 한문장의 시작을 찾기 위해 수십권의 책을 주워 삼키지만,
결국 책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이 소설을 쓰던 이해경씨의 생각이 비춰졌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앞서나간 생각일런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위기의 남자다.
위기에 위기가 꼬리를 물고 결국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남자.
위기가 가장 고조되는 그 순간 너무나 허망하게 뚫려버린 벽 앞에서
시원함과 동시에 섭섭함을 느꼈다면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맺음을 가진 소설이었다.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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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를 보았다.
사무라이 간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 내용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고,
신선조에 관련한 만화나 영화를 다수 봐왔기에 익숙한 이름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거 내가 봐 온 신선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내용을 선사하였다.

영화를 끝까지 다 본 후의 느낌은 다소 멍했다.
오시마 나기사라는 감독은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감독이라고 한다.
나는 들어본 바 없고, 영화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대체로의 평을 보니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내용을
잘 표현해낸다고 한다. 그것은 나의 '멍함'과 조금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시종일관 야릇한 분위기를 내는 카노(마츠다 류헤이)의 표정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더욱 화면을
그런 분위기로 이끌었다. 감독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의도한 것 같다.

 이 영화는 대체로 히지카타(기타노 다케시)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신선조 내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소문이 도는 등 흉흉한 분위기가 퍼져나가는데
그 모든 사실은 철저히 관찰자인 히지카타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딱히 이 영화의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히지카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단서를 제공한 채, 관객에게 추리를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카노가 타시로와 결투하던 도중 무언가를 속삭이는 장면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그 말은 잘 들리지 않고, 그 장면을 훔쳐보던 소지나 히지카타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영화를 해결할 키워드가 될 수 있는 그 말.
그러나 감독은 끝내 그 키워드를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내 식대로 영화를 이해하자면 다음과 같다.

카노는 '저에게 미래가 있나요?'라고 말할만큼 염세적이고, 미래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
더구나 '죽이기 위해서 신선조에 들어왔다'라고 말할만큼 살인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며 오히려 적극성을 띈다.
그것은 맨 처음 카노가 신선조에서 처음 처형을 할 때에도 강조된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히지카타는
누군가를 죽여본 솜씨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카노와 타시로의 관계이다.
우선 타시로가 카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뚜렷하다.
시종일관 타시로는 카노에게 집적대고 관심을 표현한다. 감춰진 것은 카노의 마음.
내 생각에 카노는 타시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둘은 사귀지도 않았다고 보여진다.
다만 카노는 타시로를 이용했을 뿐이다.

히지카타는 카노와 타시로의 결투 장면을 보며 둘이 연인관계라고 확신하게 되며, 공공연한 소문 역시 떠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카노가 의도한 것이라 생각된다.
카노는 그러한 소문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행할 살인의 정당성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소문으로 인해 자신과 관계를 맺은 유자와가 살해되었을 때, 그 범인은 타시로로 지목된다.
질투에 의한 살인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또한 타시로인 척 하고 누군가를 습격하여 결국 타시로가 처형되게 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 역시
둘이 사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애초부터 카노는 그럴 셈으로 타시로와 소문을 이용한 것이다.

 카노. 그는 이 영화에서 조금은 묘한 역할이다. 마츠다 류헤이를 처음 본 것은 '나나'에서였는데,
사실 그 역할을 맡기에 조금  어색함이 있었다. '고하토'에서의 카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신선조의 모든 남자들을 홀리고 다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마츠다 류헤이는 그 역할에 매우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눈에 띌만큼 꽃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나,
일본 특유의 가는 선과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또한 그의 눈은 매우 유혹적이고 일종의 '색'이 엿보인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신선조에 자청해 들어온다.
혹자는 그것을 강간을 당하려다 강간범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영화의 본 내용에서 너무나 벗어난 추측이기에 일단은 배제해 둔다.
그는 앞서 말한대로 팜므파탈적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매우 위험해 보인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이용하려 하며, 살인을 즐긴다. 마치 모든 이의 여왕으로서 군림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쌩뚱맞게 이어지는 소지의 긴 이야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치 지지 않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듯 모든 이 위에 군림하던 카노는 결국 소지에게 죽음을 당한다.
(이것도 의견이 매우 분분)

그리고 그 직전 소지는 히키가타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동성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는 아름답다고..
아마도 소지는 카노와 타시로의 사랑 이야기를 빗대어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결국 카노가 타시로를 아무런 망설임없이 베어버리자 소지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소지가 돌아가서 카노를 베었다고 생각한다.

 카노에게 역시 헛된 미망을 품고 있던 히키가타는 카노가 죽는 소리를 들으며 눈 앞에 벚나무를 힘껏 베어버린다.
수십 년을 함께 해 온 부장과의 관계마저도 흔들만큼 대단했던 카노.
'카노, 너는 너무 아름다웠다.' 고 중얼거리며 벚나무를 베는 히키가타의 모습이 처음에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카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힘있게 끊어버리는 결심을 드러낸 것이라 짐작된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카노가 타시로에게 했던 비밀의 말을 소지만은 들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히키가타가 듣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소지는 그 말을 들었고, 진상을 알았기에
몰래 되돌아가 카노를 죽였을 수 있다. 다만 히키가타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 말을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각종 영화에 대한 글들을 읽고 알게 된 것인데, 소지는 사실 맨 처음 카노와 대결했던 사람이었다.
카노가 소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매우 나를 헷갈리게 했다.
영화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으며, 히키가타가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린 건지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히키가타의 추측이 맞다면, 카노가 순수 악처럼 군림하며 살인을 일삼은 것과 끝끝내 머리를 자르지 않은 것은
모두 소지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시 말해, 소지는 카노의 사랑이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순수한 것이 아니라 베어버렸지만,
사실 소지에 대한 사랑만큼은 순수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카노는 신선조에 위험했다.
유일하게 신선조 내부에서 카노에게 홀리지 않았던 소지는
그 위험을 끊어냈다. 소지가 끊어낸 그것이 바로 고하토,
다시 말해 금기였을 것이다.

 

보고나서 매우 헷갈리던 영화.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 묘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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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었다



 
 

「그녀가 죽었다」

 이시키 노부유키, 오카자키 마리 作. 대원씨아이 전2권 完.

 댄서가 되고 싶었으나, 삼류 클럽에서 마를린 먼로를 흉내내고
'오빠와 함께 체조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 남자 안자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유카리.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러브호텔의 대기실.
차례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잠들어버린 각각의 파트너를
그곳에 버리고 함께 도망치며 즐거워한다.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빨간 딱지가 붙은만큼 길게 이어지는 섹스 장면.

 둘은 실컷 섹스를 하고 아침까지 함께 있는다.
그리고 안자이는 3년만에 처음으로 약 없이도 잠들 수 있게 된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사라진 그녀.
안자이는 곧 그녀를 잊고 일상을 반복한다.
약과 마를린 먼로의 의상과 함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여자와 섹스하고 있던 안자이의 집에 두 명의 남녀가 들이닥친다.
유카리의 여동생 레코와 자칭 유카리의 약혼자 소지식 군.
그들은 유카리가 안자이와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
자살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녀의 부탁대로 금붕어를 전해준다. 

  

그녀가 죽었다.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유카리의 자살 이유.

세 명은 유카리의 핸드폰에 기록된 169명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녀가 맨션에서 뛰어내린 이유를 찾게 된다.
그것이 이야기의 시작.

 

유카리의 메일친구, 예전 남자친구, 유카리에게 자전거를 판 상점의 아저씨 등
유카리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을 통해 아무도 모르던 유카리의 삶이 펼쳐진다.
카바레식 클럽에서 일하면서도 손님을 봉으로 보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보던 유카리. 7년 전 낙태 수술을 받았던 유카리.
남자친구에게 돈을 빼앗기고 차인 유카리. 어부와 함께 세미나에 등록되어 있던 유카리.
외국인 노동자들과 자전거를 타던 유카리.
섹스하고 난 후 상대 남자의 몸에 몰래 낙서를 하던 유카리.
쉽게 몸을 주면서도 자신을 10년동안 짝사랑하던 상대에게는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던 유카리.
인테리어 코디네이터 학교. 이탈리아 어학연수. 계속되는 전직. 방송작가 학원... 등.

 그러나 그 어떤 유카리에게도 찾을 수 없는 죽음의 이유.

핸드폰을 매개로 뭉쳐진 이상한 모임.
유카리를 더듬어 나가면서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죽은 것 같은 삶.
그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생기있던 유카리가 갑자기 죽어버린 이유를 찾으려는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들은 결국 유카리가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조금 섬찟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결말.
그렇지만 정말 이 만화다운 결말이다.

그녀와 함께 클럽에서 일하던 안도 사치가 말한다.

"이곳에 왔을 때는 부모와 친구를 버렸어. 
 나도 주소록에 없는 사람이야. 유카리는 핸드폰에 내 번호를
 남겨뒀지. ㅡ쓸데없는 일이야! 혼자가 편해. 혼자가 가장 좋아.
 자유롭지." 라고...

그러나 그녀는 곧 뒤돌아 이렇게 말한다.

"유카리에게 전해 줘. 고맙다고.... 번호를 지우는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 그래도... 그래도 사실은 나 혼자가 아니었어.
기운을... 얻었어."

 

현재 내 핸드폰에 등록된 224개의 번호.
이 번호를 통해 나를 찾아나선다면 어떤 모습의 내가 보일까? 

장담컨데 그것은 유카리만큼이나
순수하고 자유로운 모습은 아니겠지.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나을듯한 모습.

 

갑자기,
태양이 작열하는 무더운 날에
찐득찐득 묻어나는 아스팔트 피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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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내 심장을 향해 쏴라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마이클 길모어 (집사재, 2001년)
상세보기



「내 심장을 향해 쏴라」라는 책을 보았다. 

미국에서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스스로 죽음을 자청한 살인자 개리 길모어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친동생이 풀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추천작'이라는 표지의 문구를 보고 마음이 매우 동하여 대여하기는 했지만,
앞부분의 몇 장을 읽고 그다지 내키는 기분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도 살인자는 살인자일 뿐이다.
그 살인자를 희대의 살인마니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정했다느니 하면서 이레적인 관심을 쏟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철저한 악한 면에 악마의 매력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일종의 영웅을 창조해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 이유도 없이 충동적으로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살인자를 옹호하거나 영웅화하는 글이 아니었다.
개리 길모어는 후반부에 가서는 자신의 막내동생마저도 죽이려 한 어찌할 수 없는 살인자이다.
그러나 막내동생인 마이클이 주목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 개리는 살인자가 되어야 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태어난다.
적어도 태어나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 동등하다.
마치 환타지 소설의 요괴처럼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태어나거나
누구는 빛 속에서 태어나고나 하는 일 없이 모두 동등하다.
그러나 맹자가 선하다고 한, 순자가 악하다고 한 사람의 씨앗은 수 십년 후에 각자 너무나 다르게 변한다.
누군가는 살인자로, 누군가는 성자로.
마이클 길모어는 개리 길모어와 마찬가지로 같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살인자가 되지 않았다.
개리 길모어에게는 살인자의 피라도 흐르고 있었던걸까?

이 글은 길모어 집안의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내며, 그 원인을 끈질기게 탐구해간다.
그 과정은 매우 우울하고 슬프다.
사람에게는 많은 유전적 요인이 작용한다.
어떤 점에서는 평생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운명이나 유전에 의해 결정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지금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의 파멸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에 관한 문제와 운명이 파멸을 향하더라도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마냥 지루하고 조금은 걱정되던 교사라는 직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약간
발견한 느낌이다. 

인간 본연과 환경.
그것은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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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

독학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배수아 (열림원, 2004년)
상세보기



 배수아를 나는 '동물원 킨트'로 만났다. 잠시 사회에 대해 더듬어 보기도 하고 철저히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가끔 고민하기도 하고 세상을 탐닉하기도 하는 그런 류의 소설이라 지레짐작하며 표지를 펼쳤다. 딱히 재밌거나 와닿는 책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텍스트를 원하던 때였다. 눈에 텍스트가 와서 박히는 것이 왠지 안정적이랄까. 그러한 류의 편안함을 얻고 싶어 책을 빌렸다. 일종의 killing time이기도 했다.

   그러나 편안함을 얻으려던 당초 나의 의도와는 달리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의 독특한 시선. 아니, 정교한 시선. 눈에 와닿는 텍스트는 나의 눈 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자꾸만 콕콕 찔러댔기 때문에 나는 기댈 곳이 없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불안정한 기분이었다.

   현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러나 작가가 경험했을 80년대를 나는 모른다. 그 즈음에 나는 기고, 걷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붉은 기가 걸려있는 대학가라던가 화염병이 터지는 가운데 난투를 벌이는 대학생과 전경들의 모습이 다분히 상징적으로 떠오른다. 그 당시 내가 대학생이었더라면 앞뒤 생각 잘 못하고 성격이 급한 나 역시 그러한 무리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정치나 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그 당시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하거나 데모를 하던 것은 당연한 것이며, 정부가 공권력을 행사하며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행위를 막던 것은 매우 비겁하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는 나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어쩌면 정말로 작가 자신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읽는 내내 주인공을 작가로서 생각했다. 비록 性은 다르지만... 둘 이상의 수를 모르는 단순함. 그 어처구니없는 이분의 논리를 냉소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며 더더욱 독학자가 되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아름답고 편안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의, 어른들의, 친구들의, 부모님의 행위 없는 폭력이나 시선으로 인해 주인공은 철저히 자신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킨다. 잠시 P교수나 S를 통해 어떠한 끈을 닿으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결국 독학자의 길을 나선다. 노동은 노동으로서, 공부는 공부로서 하며 자기 자신을 어떠한 시험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내 마음 속 다양한 종류의 '나' 중에서 가장 냉소적인 내가 자주 하곤 하는 생각들. 잘나지도 않은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비웃고 꼬집는 방법들을 작가는 내내 쓰고 있었다. 그것은 작가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항상 속에 숨겨놓고 있는 나를 드러내도록 한 셈이었다. 내가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언어들이 텍스트로서 눈 앞에 펼쳐졌다. 벽을 만들고 스스로를 독학자로 만드는 행위 역시 끔찍하지만 나 자신과 자꾸만 겹쳐졌다.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주인공의 말에 의하면 내 나이는 읽을 나이이지, 적을 나이는 아니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또 적고 있다. 토해내는 것이 과연 글인지, 낙서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면서... 글이라고 다 글은 아닌데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다만 그림과 구분되는 글자인지, 의미인지 나도 더 이상은 모르겠다.

   결국은 모두가 독학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안에 숨어있는 독학자를 잠시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불쾌해졌다. 나의 독학자는 이제 다시 숨어들어간다. 독학자는 독학자이기에 '엮이지 않는'-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독학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독학자를 마음에 품은 나는 독학자가 아니기에 다시 웃을 수 있다.

 

 

 

-2006.02.2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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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98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조지 오웰 (청목, 2000년)
상세보기


1984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다. 고작 1950년까지밖에 살지 못했던 그가 1984년이라는 구체적인 해를 집어내어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시작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예전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탄복과 충격을 머금으며 읽은 기억이 있기에 이 소설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대와 예측을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측했던대로였다. 그러나 그 예측대로라는 말의 뜻은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충격과 탄복을 나에게 제공해주었다는 말이며, 예상했던대로의 내용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강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엄습했고, 특히 1부와 2부, 3부 등으로 뛰어넘을 때에는 미처 생각치못했던 다음 내용에 계속 충격을 받았다.

'동물농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으나, 읽은 지 5년도 넘은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는 마지막 장면으로 인간과 돼지의 모습이 혼돈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책도 역시 잊혀지지 않을만한 마무리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이 책의 내내 등장하는 가상의, 혹은 가상의 것이 아닐 대형을 결국 사랑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암울하고 답답하며 기계적인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무언가 변화를 꾀할 주동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던 주인공 윈스턴이 결국 애정성에서의 고문과 말할 수 없을만큼 여러 가지 고통, 번민 끝에 대형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부분에서 깊은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흔히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그는 영웅이 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패배하였다. 일개 개인으로서, 전체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 그 전체는 너무나 공고하고 단단하였다. 2+2=5라고 믿게 만드는 전체. 어제까지 전쟁국이었던 유라시아가 당장 오늘부터는 동맹국이었다고 믿어지는 사회. 있었던 것들이 증발하고, 없었던 것들이 생겨나며, 나날이 발전되고 있다고 믿어지나 실상은 퇴보하고 있는, 그러나 그 퇴보의 사실을 모두들 망각하고 있는 끔찍한 사회.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회를 조지 오웰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흔히들 말하는 좌파에 대해서도 불쾌감이 들거나 하지 않고, 잘은 모르지만, 오히려 흔히들 좌파에 가지는 부정적인 생각에 반발하여 친근감을 느낄 지경이다. 특히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보다 훨씬 인간의 선함을 믿고, 다 같이 잘 살자는 매우 인간적인 모토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완벽하게 실천된다면 유토피아가 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완벽한 실천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완전한 방편으로 자유주의 안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맞지만 말이다. 그러나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그린 것은 단순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내세운 전체주의이다. 1984년에서 윈스턴을 고문하던 오브리엔은 말한다. "개인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당은 죽지 않고 영원하다." 라고. 여기에서 '당'이라는 것이 바로 '전체'일 것이다. 개인이 말살되고 전체만이 남은 세상. 그러한 세상이 얼마나 비관적으로 펼쳐질 것인지를 오웰은 절망적인 내용으로 그려낸 것이다. 결국 전체 안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은 증발될 것이며, 모든 인간은 전체에 알맞은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라며 죽게 될 것이다.

  1984년은 앞서 말한대로 1950년대 이전에 쓰인 소설로 물론 그때와 지금의 사정은 많이 변하였으므로, 오웰이 소설에서 예고한대로의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그가 말하는 몇몇 부분은 아직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화씨911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사실 9.11테러는 부시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이 명백히 진실이라 하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이나 증거들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1983년에서 골드스타인이 썼다는 금서에 쓰여 있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부시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전쟁은 승리나 패배를 낳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전쟁이 멈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멈추어서는 안되며,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전체주의의 영원을 보장해줄 것이다.' 우리도 암암리에 알고 있듯 전쟁은 많은 권익자들에게 기여하며, 그들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 이러한 물음은 결국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듯 '전쟁은 불필요한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겠으나, 결국 이 소설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전쟁이 전체주의의 유지에 기여한다는 것. 그것이다. 자꾸 지금의 현실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미국 사회 역시 이 소설에 나온대로의 전체주의 사회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가. 언젠가 사회과교육의 어명하교수님께서 미국은 melting pot에서 salad bowl로 변화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서 하나로 끓이려는 시도에서 각각의 개성을 살린 채 조화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미국민들이 변화하는 모습은 사실 많은 세계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고, 특히 부시를 정점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전쟁에 대한 집착은 매우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며, 그들이 진정 전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것인가 의심하게 한다.

  아무튼 각설하고, 1984년은 이렇듯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지금의 시점에 맞추어 생각될 수도 있으며, 이 말은 우리의 세계 정세가 50년 전에 한 영국 작가가 염려하던 것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비전체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 안에 살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오웰이 예견한 비극인 것이다.

  또한 논외의 이야기지만, 오웰이 이 이야기에서 끄집어 낸 '신어'라는 개념은 무척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불필요한 단어를 모두 삭제하고 꼭 필요한 단어와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금 우리에게는 good, bad, better, best 등의 단어가 있지만 신어로 하면 이 모든 것은 good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 bad는 ungood으로, better 은 plusgood으로, best 는 doubleplusgood 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이로써 bad, better, best라는 불필요한 단어들을 없앨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신어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필요로 하지 않은 개념을 아예 말소시키는 기능 도한 해 낸다. 전체주의 사회가 원치 않은 개념은 아예 언어로 존재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언어가 생각을 지배한다'라고 평소에 쉽게 생각했던 한 주장이 다시 한 번 머리에 스쳤다. 즉 언어를 없앰으로써 생각조차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언어의 부재'를 상상하자 곧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특히나 나같이 말 많은 수다쟁이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오웰은 전체주의의 비극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경험시켜주었다. 읽는 내내 나는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맛볼 수 있었으나, 읽고 나서 엄습해 오는 허망감과 비탄스러운 마음이 웬지 서글프다.






▷ 기억에 남는 부분들

229쪽.

"제 정신이란 통계로 결정한 게 아니야."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평화성'은 전쟁을,
'진리성'은 날조를,
'애정성'은 고문을,
'풍부성'은 아사를 담당하고 있다.


 

 

-2005.01.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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