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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5.12 FACTFULNESS
  2. 2010.09.1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 2010.05.16 [지식인마을30] 벤야민&아도르노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4. 2010.02.17 눈먼 시계공
  5. 2009.05.04 인간 연습
  6. 2009.05.04 그리스인 조르바
  7. 2009.05.04 친절한 복희씨
  8. 2009.05.04 파피용
  9. 2009.05.04 참말로 좋은 날
  10. 2009.05.04 소유

FACTFU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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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취향이 전혀 아니던 책을 친구의 추천과 코로나의 지루함때문에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생각보다 무척 재미있게 읽고 무려 리뷰를 쓰기에 이르렀다.

 

내가 어릴 때에만 해도 뉴스는 진실과 사실을 보도한다고 믿었다. 

뉴스와 신문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사의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읽으려고 애썼다. 

더더욱이 사설은 글쓴이의 주관적 에세이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왜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이해하려 애썼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비판적 글읽기에 대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그들이 전적으로 사실을 보도할 것으로도, 또 쌍방의 입장에 대해 고르게 균형있게 보도할 것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이 쏟아내는 기사의 양은 내가 어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아졌다. 기사의 스펙트럼은 넓어졌고, 독자로서 필요한 비판적 글읽기의 역량은 커져만 간다. 

 

그러나 그 필요성을 절실히 알면서도 기사나 세상을 어떤 식으로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기란 쉽지 않다. 대체로 숫자나 그래프를 제시할 때에도 제시하지 않는 그래프를 상상한다던지, 그래프에서 어떤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던지 어설프게 가지고 있는 기준은 있으나 구체적인 길잡이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팩트풀니스에서는 언론이나 세상이, 또 대중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10가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내가 세상을 이해할 때 주의할 점을 체계적으로 알려주었다. 

이 10가지 이유를 차례로 따라가며 나는 대체로 나 역시 비슷한 오해의 현장을 목격했던 각각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었으며, 현재 코로나 사태에도 대입할만한 몇 가지 지점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언론이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다던지, 정치인들이 문제를 과장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이 평범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사안에 주목할 수 없는 이유라던지 정치인들이 왜 문제를 과장할 수밖에 없는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다만 읽는 사람들은 그러한 배경을 잘 인식하며 과도하게 공포를 가진다던지 긴급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준다. 

사실의 지점을 여러 데이터로 잘 파악하고 세상이 꾸준히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면 우리가 내리는 잘못된 결정 등의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 10가지 이유를 마지막에 그림으로 잘 정리해두었기에 찍어서 함께 첨부해둔다. 

 

(+덧, 최근에 '세습중산층사회' 라는 책에서 이제 1:99의 빈부 차가 아니라 20:80의 소득 격차를 이야기했는데, 이 책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극빈층이 아직도 세상의 대다수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현재 2,3단계에 이른 중산층 국가 및 사회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역시 두 책의 저자가 같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2040년의 전망에서는 3단계에 이른 국가들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우리가 마치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매사에 불안하거나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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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생일선물로 받았던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요즘 읽고 있다.
감옥에서의 생활이 어떠한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그 답답하고 고된 생활 속에서도 
세상과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연히 보인 나비 한 마리, 아이들의 함성 소리, 새벽녘의 빛에도 하나하나 민감히 반응하여 
결국에는 깊이있는 사색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놀라웠다.

책은 대체로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모은 형식인데, 부모님이나 형수님, 아우, 형, 계수님께 
보낸 편지들의 어투나 내용이 매우 고전적이어서 낯설고 이상스러웠다. 
그러나 언뜻 처음에 보았던 감옥살이의 날짜(1968-1988년)가 그냥 생각하기로는 근대사에 가까우므로 
비교적 최근으로 느껴지지만, 현재 읽고 있는 2/3 지점에서조차(1982년) 나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임을 
생각해보면 그 실제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고작 백 년도 채 못 사는 내가 40여년 전을 최근으로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거만한 태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 귀로 몇 백 년 전, 몇 천 년 전, 몇 억 년 전 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거듭 듣다보니 
그 실제의 크기는 망각하고, 그저 숫자 놀음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신영복님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중에 가장 인상적이던 것은 '피서'의 이야기였다. 
피서(避暑)가 아니라 피서(避書)다.
감옥이라는 좁은 곳에 갇혀있다 보면 응당 많은 책을 접하는 것이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계속 발전해가는 좋은 계기가 아닐까 싶지만, 신영복님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개의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거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분서를 욕할 수만도 없습니다.

                                       (중략)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 대신 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정리된 생각과 실천이다.

돌아보면 무한정 책을 읽기는 하나, 마치 과식한듯 내용을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적이 많고, 
어떤 때는 이 책, 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마치 내 생각인양 착각했던 적도 있던 것 같다.
어느새 책은 많이 읽는 것이 좋다라고 단정해 버렸다.

 '불에 데이면 아프다'고 글을 통해 아는 것과 실제로 불에 데인 아픔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 많이 다를 것이다.
그저 말과 글을 통해 아는 것을 전부 아는 양 여겨서는 안되겠다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이전에 데이빗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이란 책을 인상깊게 본 기억이 난다. 
그 책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도 저자의 글과 실제 행동이 일치했으며, 
그가 매우 실천적인 삶을 지향했던 데에 있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비교적 꽤 있으나 정말로 실천적인 사람은 
드문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관조와 게으름으로 삶을 소모해가는 최근의 행보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책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날카롭게 가시 선 마음이 보다 따뜻하고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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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마을30] 벤야민&아도르노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기억을 위한 메모



*프랑크푸르트학파(비판이론)

   - 당대의 주요한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해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사회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 각각의 분과 학문 체계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경제학, 정치학, 철학, 사회이론, 심리학과 미학 등의 다양한 방법론과 연구 성과들을 결합하여 보다
     다층적인 학제간 (interdisciplinary) 연구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 비판이론의 두 단계
    초기 :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신념을 유지, '전통 이론과 비판이론', 철학, 정치학, 사회과학의 종합에 근거한 현대 사회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의 생산을 목표로 함(1930년대)
    후기 :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신념을 상실, '계몽의 변증법', 인간의 자연 지배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한 역사철학, 철학적
             인류학 및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목표(1940년대 이후)



* 순수이성비판, 칸트

  - 우리의 시대는 모든 것을 비판에 회부해야 하는 고유한 비판의 시대이다. 종교는 신성함을 통해서, 입법은 그 위엄을 통해서
    비판을 면제받으려 한다. ...... 그러나 이성은 오직 자신의 자유롭게 공개적인 검사를 견딜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거짓 없는
    존경을 허용한다.



*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계몽의 변증법' 中)

   - 인류사의 필연적 결과. 진보적 사유라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계몽'이 사실상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어왔음.
     계몽의 이러한 퇴행적 경향이 이미 인간의 '합리성' 자체에 애초부터 내재하고 있음

   - 인간의 자기보존→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인간에 의한 사회적 지배→인간에 의한 인간의 내적 자연의 지배
      →계몽에 의한 지배의 총체화; 인간에 의한 인간 자체의 말살(자기소외)



* 계몽적 주체의 귀환
 
   - '오디세이아' 관련
      살아남고 싶은 자는 회복될 수 없는 유혹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 유혹을 들을 수 없을 때만의 살아남을 수 있다. 사회는 항상 이를 위해 배려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을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은 무시해야 한다. 그들은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충동마저 그 이상의 노력으로 집요하게 승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실제적이 되는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中)
      오디세우스는 계몽적 주체의 본질인 자기보존을 위해서 자신의 내면적 자연, 즉 자신의 본능과 감정을 억압하며 세이렌의 노래로 상징되는 '행복에의 약속'을 단호히 포기했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볼 때, 계몽적 주체의 자기유지는 자기부정, 즉 자신의 내적 욕망과 충동을 부정하고 억압함으로써 얻은 귀결이다. 결국 문명의 역사는 계몽적 주체의 자기희생이 내면화되는 역사이자 체념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 오늘날의 사회는 어떻게 이렇듯 피지배 계급의 무능력과 순응주의를 양산할 수 있었을까?

   - 이성의 지배가 총체화
     →계몽의 이상은 양화의 원리와 계산 가능성의 원리에 기반한 체계를 도출
     →이성은 '도구적 이성, 즉 계산하는 이성'으로 전락

   - 베버의 합리화론
     오늘날 : '가치 합리성(실질적 합리성) < 목적 합리성(형식적 합리성)' ⇒ 가치의 상실, 자유의 상실

   - 동일성 원리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서로 다른 대상들을 주체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강제하는 지배 원리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비동일적인 것을 동일성 속에 포섭시킴. 서로 다른 타자를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보편이라는 이름하에 특수를 말살시킨다.

   - 동일성 원리의 총체적 지배
      ① 외적 자연의 지배에 적용된 동일성 사고 : 개념적 인식
      ② 사회적 지배에 적용된 동일성 사고        : 상품 생산 사회의 교환 원리
      ③ 내적 자연의 지배에 적용된 동일성 사고 : 문화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
         (※ '대중문화' 대신 '문화산업'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해냄. 대중문화라는 표현의 경우 '대중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문화'라는 긍정적 뉘앙스를 가짐)

   - 문화산업론 中
      문화산업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고약한 방식으로 실현시켰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 가능하며 개인은 교체 가능한 복제품에 불과하다-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각자는 절대적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로서 절대적인 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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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 책의 차례와 키워드

1. 결코 있을 법하지 않은 일
    - 생물의 복잡성. 설계자 X

2. 훌륭한 설계
    - 박쥐, 눈 등

3. 바이오모프의 나라
    -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표현된 진화. 한 점에서 생물에 이르기까지.

4. 진화의 갈림길

5. 유전자의 힘

6. 생명탄생의 기적

7. 건설적 진화

8. 폭발과 나선
    - 폭발(성 선택)과 나선(군비확장경쟁)
    - 정의 피드백과 부의 피드백

9. 구멍 난 단속평형설
    - 용어의 사용에 문제 (점진주의자 vs. 단속론자)
    - 다위의 점진은 反도약설임. 전진설은 속도 일정설과는 다른 의미임.

10. 진정한 생명의 나무는 하나
    - 분류학

11. 경쟁 이론들의 최후
    - 진정한 다윈주의에 대한 설명
    - 라마르크주의, 가짜다윈주의, 창조록, 중립론 등에 대한 명쾌한 반론




■ 감상

  초등학교때부터 배워 온 생물학의 지식이 기억의 언저리를 희미하게 떠돈다.
용불용설, 획득형질, 다윈 등의 단어들은 구분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진화'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다.
'이기적 유전자'가 깜짝 놀랄만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가득찬 책이었다면, 이 책은 다소 모호하고 이해되지 않던
다윈주의의 내용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 한 권으로 나는 다윈주의 뿐 아니라 중립론, 분류학, 라마르크주의 등에 대한 이해까지 성취할 수 있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놀라운 비유와 적절한 어휘 사용으로 너무나 명쾌하게 모든 것을 설명한다.

특히 바이오모프로 설명한 생명 진화는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설명이라
진화심리학을 과학적 부분이 다소 배제된 학문으로 여겼던 이전의 인상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의 독특한 유머와 함께한 책의 전반은 매우 즐거웠고, 다윈주의의 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실은 정확하게 다윈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는
예민한 관찰력과 그들의 오해의 순간을 잡아낼만한 순발력이 필요한데 도킨스는 그것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도킨스의 설명을 들으며 어느 부분에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었고,
그것을 피해가는 방법을 습득하였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가짜 다윈주의자와 진짜 다윈주의자의 대화는 도킨스의 유머와 통쾌한 설명과 예리함이
갖춰진 최고의 부분이라 말하고 싶다.

내가 배워왔던 생물학의 그 공허한 단어들은 모두 무엇이었던가.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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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인간 연습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조정래 (실천문학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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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송환'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비전향 장기수.
어쩐지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그 이름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들이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시쳇말로는 '빨갱이들', 다른 말로는 '남파 간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한에서 활동하다 잡혀 감옥살이를 하며 평생을 살던 간첩들 중에서 끝끝내 전향을 하지 않은
그들은 남북 관계가 평화를 향해 치닫기 시작하던 즈음에 드디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얼굴을 보면 그저 이웃집 할아버지같은데, 끝끝내 사회주의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낭비하는듯 보이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내심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비록 감옥 안에서라지만 남한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았고, 남한 정부의 호의로 돌아가게 된
그들이 희희낙락하여 떠나는 모습하며 북한에 도착한 그들이 신념을 굽히지 않은 영웅으로
대접받아 또다시 북한의 정치공작에 이용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복잡하였던 것 같다.
물론 그에 앞서 타국에 의해 갈라져있는 현재의 실정이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오늘 읽은 '인간 연습'은 그 때 그 영화에서 본 이들과 같은 이른바 '빨갱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은 송환에서의 이들이 전향을 하지 않아 결국 영웅으로서 북한에 돌아가는
이른바 해피엔딩을 가진 것과는 달리 남한에서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전향을 하여 남한에서는
'빨갱이'로 찍히고,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버린 '전향 장기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신념 하나만을 무기로 하여 가족도, 자신도 버린 채
삶을 지탱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참 딱했다. 그들의 잘못이라면 무얼까. 지나치게 순수했고,
지나치게 곧았달까. 그러나 그들이 감옥에서 때묻지 않은 신념을 고이 간직하는 동안, 세상은
변하였고 지나치게 손을 탔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바였다. 처음에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었던
것이 전쟁을 통하고, 비방을 통하고, 서로의 안전을 위협하는 동안 이미 사상을 넘어서 감정의
문제가 되었고 그 와중에 처음에 품었던 이데올로기나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책에서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화합이라던가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좀 더 개인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대신
한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책의 주인공 윤혁이 결국 삶을 되찾은 것은 이미 무너져버린 자신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현재까지 굳건한 상대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
사람이 다름 아니었다. 집 없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과 살갗을 마주대고, 식사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면서 비로소 무수한 세월 동안 찾아왔던 삶을 되찾은 것이다.

책의 제목은 '인간 연습'이다. 비슷한 제목의 책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 있다.
어쩐지 나는 제목에 '인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에 흥미가 생기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내 제1의 관심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한 번 뿐이며, 흘러가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삶에는 연습이 없다. 인간이란 리허설없이 계속해서 실전과 맞부딪혀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윤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이를 먹고서도 간직하는 신념은 오래 산 이들의 아집과 다르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회의하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려 애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차츰차츰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런지...
'46개의 염색체를 가졌다고 해서 인간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되려면 인간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윤혁이 바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굽히지 않는 신념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를 포함한 -비전향이든 전향이든-장기수들의
기록된 삶은 모두 연습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실전의 기회를 갖도록 할 수는 없는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는 그리 성숙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념을 지킨
숭고함은 높이 사지만, 보다 평화로운 시기에 다시 태어나 신념도 지키고, 일신의 평화도 기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더불어 나의 현재 삶도 연습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은 왠지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나는 흘러가는 빠른 시간을 한탄하고, 끊임없이 과거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지만 살아왔던 삶을
모조리 연습으로 치고, 다시 실전을 겪는다는 것은 어쩐지 끔찍한 일이었다. 

인간이란... 삶이란 어쩌면 연습이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이나 발표와는 달리 삶이란 다소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라도 가치가 결코 덜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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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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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예상치 못한 채 거장들의 작품을 대할 때의 기쁨과 놀라움은 어디에도 비길 곳이 없다.
오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를 읽었을 때의 내 마음 역시 그랬다.
이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침착하게 상황을 응시하는 두목 나으리도,
삶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조르바도 모두 너무나 생생하여 방금 막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반짝이는 물방울을 튀기며 긴박감있게 튀어오르고 있었다. 

조르바.
그는 '인간' 그 자체였다.
도덕, 관습, 예의, 의무 등은 그에게서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그는 내키는대로 살아왔고, 그 과정에는 단 한번도 거침이 없었다.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어느 독자는 조르바의 엽기적인 기행을 참지 못했는지,
결국에는 책 어귀에다 '미친놈'이라는 메모를 남기고 말았다.
하하, 말 그대로였다.
조르바는 미쳤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용기와 대담함, 무모함 등은 지면과 독자를 압도하였고,
때로는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사람은 자기와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단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단계를 지나자 이 글의 서술자인 두목(?)처럼
조르바를 부러워하고, 또한 좋아하게 되었다. 뭐, 어디까지나 독자로서의 문제지만...

조르바는 서생처럼 느껴지는 이 글의 화자에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이 얼마나 가슴 철렁한 말인가.
조르바의 이 말은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양 귓전을 울려서 나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면서도
한편으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르바는 기인이었지만, 마냥 야만인은 아니었다.
후반부에 나오는 과부의 피살사건이나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에서
마냥 야만인처럼 느껴지는 조르바가 얼마나 인간다운지,
또 문명인인듯 행세하던 이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인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기에 더욱이 조르바는 '인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결코 조르바처럼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조르바가 두목에게 이야기했듯, 나 역시 자유를 갈망하고 줄을 끊겠다며 큰소리치겠지만,
그저 줄을 무한정 늘릴 뿐이다. 결코 용기있게 줄을 싹둑 잘라내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그러한 조르바의 이야기에 두목은 실망하지 않는다.
그는 대답한다.
조르바가 버찌를 토할 때까지 삼켜 버찌를 이겨냈듯이,
자기는 책을 토할 때까지 삼켜보겠다고...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얼마나 당당한 대답인지...
그동안 이 작가를 모르고, 이 책을 몰랐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그리스 남부의 크레타 섬.
그저 이야기로만 들었던, 막연한 이 곳이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펌프질하며
영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어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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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친절한 복희씨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완서 (문학과지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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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씨의 '친절한 복희씨'는 역시 세월과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느낌이랄까. 전혀 무리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비유와 묘사임에도 감질맛나고 적당한 필치로 삶을 조리하였다. 그 나이에 이르른 소설가여야만 가능한 글들. 최근 젊은 작가들의 다소 혼란스럽고 조금은 감각적인 글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그러한 글들이 재미있고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때로 무리한 비유나 과장된 비약 등이 지나친 평가를 받는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과 경험이 만들어낸듯한, 적당히 풍화되어 이제는 둥글둥글해진 조약들같은 글들을 접하고 나니, 경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 어머니는 책을 거의 읽지 않으시지만, 읽는 내내 어머니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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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파피용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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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읽은지 꽤 되었다. 고등학생때 '개미'를 처음 접하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다. 기발한 상상력과 내용 전개에 흥미를 붙여 당시 나왔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모두 삽시간에 삼켜버렸지만, 한꺼번에 과식을 한 탓인지 뒤로 갈수록 신선도가 떨어져 곧 흥미를 잃고 말았다. 덕분에 오랜만에 읽은 그의 글은 요즘 잊고 지내던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센세이셔널하게 다시 한 번 불러일으켰다. 또 다른 지구를 찾아 헤매는 인류의 천 년에 걸친 여정. 그 끝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어찌보면 절망적인 그러나 또 다른 탄생으로 희망을 예고하는 그런 글이었던 것 같다.

그의 책답게 지루할 틈 없이 삽시간에 읽어내려갈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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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참말로 좋은 날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성석제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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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은 서너권 읽었던 것 같다. 그의 책을 고른 데에 딱히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작가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을 뿐...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꾼이라 부른다. 그렇다. 그는 정말 이야기꾼이다. 가마솥에 누룽지를 박박 긁어먹듯, 열기가 남은 화톳불에 감자를 구워먹듯 구수한 이야기를 능란하게 해내는 인기 이야기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 서너권을 구별없이 주워 삼키는 동안 내가 특별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독특한 그의 문체에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옛날 이야기 들려주듯 어르고, 달래고, 추임새가 있는 그런 문체. 어린 시절 엄마가 해 주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같은 이야기.
그러나 결코 내용은 그렇지 않은 이야기. 나는 낯을 무척 가리기에 그런 문체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랏' 하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 어느 순간 푹 빠져들었다. 예전의 책과 마찬가지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끔하고 매끄러운 문장 구성력하며 입담은 그대로인데 그의 무엇인가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해학적이고 우습던 그의 이야기는 어디로 간 것인가! 제목은 '참말로 좋은 날'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때로 읽는 이를 공통으로 기운빠지게 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다. 가장이 자신의 아들, 딸,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한다던가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류의 기사이다. 그런 기사를 접할 때면 나는 도대체 무슨 억한 이유가 있길래 그렇게 상상도 할 수 없이 참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 그런데 그렇듯 참혹하고 상상도 안되는 사건들이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 생생히 재연되고 있었다. 그 특유의 맛깔나던 입담이 옛날 이야기가 아닌 현대의 비극을 이야기할 때 얼마만큼 적나라하고 안타까운 소설이 탄생하는지 확인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들. 아둥바둥해도 제 자리, 아니 제 자리도 못 지키는 사람들이 눈 앞에 살아 숨쉬고 있는듯하여 소설 하나, 하나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쉬어야 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눈을 감아도 한참동안 그 잔상이 가시질 않듯, 눈을 감아도 소설의 잔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나는 문득 모든 것을 잊고 잠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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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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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A.S 바이어트 (미래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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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시인의 로망스를 추적해나가는 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아내와 삶에 성실하다고 알려진 랜돌프 핸리 애쉬의 메모를 가난한 학자가 발견하고, 이를 추적해 나가며 숨겨졌던 그의 사랑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100여년 전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애쉬와 크리스타벨과 같이 그 뒤를 쫓는 롤래드와 모드 역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잘 짜여져 있고, 문체가 아름다우며 매우 사실적이다. 서로 소유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가. 바이어트가 소설에서 제시하는 이러한 사랑법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과거의 두 시인, 또 두 시인의 자취를 쫓는 현대의 학자, 그 학자들을 쫓는 다양한 학계의 인물들 등..

추적에 추적이 꼬리를 잇는 형상은 일종의 긴박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소설의 결말에 대한 기대를 모은다. 더욱이 간간이 소설에 알맞게 간을 쳐주는 과거와 현재의 두 로맨스는 소설의 풍미를 더욱 깊게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라 하면,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두 시인의 시에 대해서만큼은 도무지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시'라 하는 것은 지극히 언어적이다. 함축적 어휘와 리듬감의 절묘한 조화가 시를 감동적으로 만드는 장치인데 그 세심하고 예민한 장치는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작동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로 나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시인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받게 마련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경우 아무리 유명한 시인의 시라 할지라도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한다. 한때 랭보의 시가 뿜어내는 독특한 분위기,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단어 선정에 흠뻑 빠져 그의 시집을 산 적이 있었지만, 그의 시 만큼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나는 시를 제대로 읽고 싶어, 그의 전기를 읽었지만 결국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삶이지, 시가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잘못 생각했던 점이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을 알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를 이해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 책의 역자가 훌륭하게 애써서 번역을 했다 할지라도, '시'라는 것은 다른 언어로 바뀌어 버리는 순간 온몸에 흠뻑 머금고 있던 축축한 매력이 모두 말라버리고, 물기 한 점 없이 따가운 태양 아래 바싹 말라, 만지면 부스러질듯한 어설픈 형체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시'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원래의 시를 쓴 작가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역량이 필요하리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신화와 요정, 삶과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 시인들의 시는 내게 있어 그저 아름답게 치장된 액자에 불과했다. 결코 그림 자체에 속하지 못한 채, 그저 그림을 그럴듯하게 장식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소유'의 가장 가치있을 그 부분들이 말이다.

키츠니, 엘리엇이니 이름난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머리 전반을 지배하던 지루함이나 일본의 하이쿠를 읽을 때 드는 어처구니없음이 각국 언어에 대한 나의 무지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러나 시를 그저 장식이나 도구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나에게 몇 번이나 '랜돌프 핸리 애쉬'를 실제하는 시인으로 착각케할만큼 생생한 상황을 꾸려나간 스토리와 솜씨좋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문학적이고 탐구적인 분위기 역시 섣부르지 않고 정제된 문체와 더불어 나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주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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