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찾아가기 - 하조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재생되는 겨울바다의 영상을 떨쳐내고자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이번 목적지는 '하조대'.
하조대까지 가는 티켓을 구매했는데, 정해진 개찰구에 있는 버스는 강릉, 주문진행이었다.
강릉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고 기사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버스로 긴 시간을 가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 PMP에 책에 바리바리 싸들고 왔지만,
정작 크게 필요치 않았다.
동그스름한 등허리의 야산들과 앙상한 겨울나무들, 군데군데 남아있는 눈들, 벼 밑둥만 남은 논 등을
보는 것이 무척 오래간만인 것처럼 느껴져 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강릉은 잘 정돈된 도시였다. 요즈음은 국토개발사업이 고루 잘 이루어진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어디를 가도 크게 낯선 느낌을 받지 않게 된 것 같다. 표지판이나 도로 정비
등이 표준화되고 전국을 아우르는 체인점이 많이 생긴 덕분일 것이다. 

 강릉에서 아저씨가 연계해준대로 다른 버스를 옮겨탔는데, 주문진으로 가던 남은 손님들도 모두
줄줄이 그 버스에 옮겨탔다. 내 옆쪽에 앉은 아주머니는 노기가 등등하여 기사 아저씨에게 마구
따졌다. 아주머니 말인즉슨, 주문진행 버스인데도 불구하고 노상 강릉까지 도착한 후 다른 버스에
옮겨타게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나로서는 시간의 압박을 느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저 버스의 커튼 사이로 들어있는 햇볕이 참으로 따사롭게 느껴져 평화를 만끽할 뿐이었다.

 

 

 버스가 주문진에 도착해 많은 사람들을 떨구고, 다시 하조대를 향해 출발하자 오른쪽 창을 끼고
푸른 바다가 그 모습을 찬란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나는 왼쪽 창쪽에 앉았으므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감칠맛나는 풍경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버스로 약 20분 넘게 달렸을까, 드디어 하조대에 도착하였다.

하조대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니만큼 여름 관광시즌에 대비한 상가들이 즐비하였는데,
현재는 비수기이기에 모든 상가가 한적하고 거리도 조용하였다. 정류장에서 내려 300~400m가량 걸으니
드디어 바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곱디 고운 하얀 모래가 길게 펼쳐지고, 바다는 하늘만큼이나 푸르러서 포토샵으로 선명하게 조절한 것마냥
아름답고 선명한 색상이 돋보였다.

 주변의 숙소들을 대충 둘러보다가 '알프스비치모텔'이란 곳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들어가서 방을 잡았는데, 바다 반대편은 3만원, 바닷가쪽은 4만원이라 하였다.
어차피 내내 바다에서 놀 생각으로 3만원짜리 방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후회하였다.

 

 

 짐을 방에 두고 나오니 어느새 4시였다.
바닷가를 뒤로 하고 일단 하조대로 향했다. 내가 잡은 숙소에서 하조대까지는 1km 거리였다.
15분 정도 걸으니 등대입구에 도착하였는데, 이 곳에서 우측은 하조대, 좌측은 등대였다.
일단 하조대부터 보기로 결심하고 오른쪽 계단으로 올랐다.

하조대는 조선초 개국공신이었던 하륜과 조준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두 사람의 앞자를 따
'하조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경치가 좋은 곳에 지어진 정자인데 지금 지어진 것은 1998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건물이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망가진 곳이 크게 눈에 띄었다. 또한 울창한 나무 사이에 가려진 바다가 감질맛나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여름이었으면 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바닷바람이 좋아서 아름답게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멍하니 정자에 앉아 지는 해를 받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왜 겨울바다를 보겠다고 이 먼곳까지 와서 혼자 앉아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차가운 바닷바람이 오리털 파카안으로 파고들어오면서부터 급속한 외로움과 우울함이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감칠맛나는 바다니 어쩌니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정자에 자리잡고 앉은지 한시간을 훌쩍 넘겨있었다. 이러다가 해가 져버리면
등대에 못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내려왔는데 역시 예상대로 등대는 굳게 잠겨있었다.
동계에는 5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

 다시 1km를 걸어 하조대 바닷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바닷가는 어마어마하게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온이 급속히 떨어지며 몸 사이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바닷가를 떠나기가 싫어서 옷깃을 세우며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드넓은 하조대 바닷가는
온통 내 차지였다. 여름이면 사람들로 꽉 들어차 발 디딜 곳 없을 이 곳에 지금은 사람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에 나의 발자국을 남기며 가려진 곳 없는 탁 트인 바다를 따라 계속 걸었다.

 


 

 정말 예전부터 항상 신기하게 여기던 것중에 하나였는데,
나는 성격이 참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파도치는 모습이나 물결이 이는 모양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멀리서 바람이 불며 파도가 커졌다가,
해변에 가깝게 오면 다른 파도들과 부딪혀 하얀 거품으로 사그라드는 모습은 무한히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것 같은데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는 놔주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를 이리저리 조절해가며 내가 보고 느끼는 바다를 그대로 기계 장치 안에 담아가기를
원하였으나, 조금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포기하였다.

 


  

이미 해는 그 몸뚱아리를 지평선 아래로 숨겨버리고 아직 모체를 따라가지 못한 실낯같은 빛의 음영만
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데도 못내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웠다.
오른쪽 부두를 따라 걸으니 갈매기들이 길게 하늘을 맴돌며 나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장갑낀 손의 손가락마저 추위로 마비될 지경에 이르른데다
점차 어둠이 깃들고 있었으므로, 해가 진 바다와 안녕하고, 숙소 1층 편의점에서 저녁거리와 술을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아침까지 일정이 전혀 없었으므로 오랫만에 TV를 보며 저녁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근래 잘 느끼지 못했던 극심한 우울함과 쓸쓸함이 더욱 심화되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취해서 잠들곤 했는데, 오늘은 한 병을 다 비우도록 취하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제끼니 비록 바닷가쪽은 아니지만 윙윙거리는 바닷바람 소리와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고개를 묻고 실컷 바다소리를 감상하였다.

 


 

 정말 너무나 우울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TV도 지루했고, 가져온 PMP는 분명히 가득 충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책의 활자 역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한없이 무기력한 상태로 우울함에 몸을 던졌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지만, 정말 밤새 거의 한잠도 자지 못하면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아침이 되기만을 바랐다.

 

드디어 아침.

굳게 밀봉된 방 안에서 어둠을 개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며 30분 이상 뒹굴거린 후,
겨우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더니 환한 빛이 눈을 찔러서 눈물이 났다.
햇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바깥의 풍경이 어찌나 생동감있던지 간밤까지의 무기력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밤새 우울함에 몸부림치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아침에
눈뜨자마자 바다고 뭐고 정리하여 서울행 버스를 탈 결심이었는데 그 결심이 어느틈에 무너져버렸다.

 대충 아침을 챙겨먹고 가방을 둔 채 밖으로 나왔다.
어제 포기하고 못 본 등대를 보러 갈 의욕이 솟아올라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하조대쪽으로 향하였다.
어젯밤에 매섭던 추위도 온데간데없고 겨울같지않게 참으로 따뜻한 날씨였다.

굽이굽이 계단과 통로를 걸어 드디어 등대에 도착하였다.
하얗게 칠해진 작은 무인등대였다.

 


 

 등대 자체가 기대했던것만큼 아기자기 예쁘고 잘 꾸며진 것은 아니었지만, 등대보다는 등대 부근에서 보는 풍경이 무척 좋았다. 막힌 곳 없이 탁 트인 시원함에 한껏 들뜨기 시작하였다.

아침해를 받고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바다가 무척 좋았다.

 


 

 조용히 바다를 감상할나는 찰나, 갑자기 많은 어르신들이 좁은 공간에 들어오기 시작하셨다.
가족끼리의 모임인 것 같았다. 신경쓰지 않고 즐기려고 했는데 그분들께서 나에게 단체 사진을 부탁하셨다.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끼리 참 친하고 화목한 것 같았다. 나름 신경써서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어르신들께서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셨다.
아가씨가 왜 혼자 이런 곳에 왔느냐는 말부터 애인 있냐는 말까지..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어르신들끼리 질문과 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재밌게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불과 몇 분 만에 나는 그 가족의 막내며느리감이 되어버렸다. 나는 넉살이 없어 그런 이야기에 능숙하게 대꾸하지 못하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허둥지둥했다.
가장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를 부축해드리며 등대에서 내려왔다.
어르신들께서는 주문진으로 가신다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셨지만 나는 이만 서울로 올라가야 했으므로 사양하였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하조대 바닷가쪽으로 걸어오는데 무척 기분이 좋았다. 어르신들의 떠들썩하고 유쾌하던 분위기가 나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인복이 많아서 어딜 가든 항상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짐을 모두 챙긴 후 드넓은 바닷가를 또 홀로 차지한 채 실컷 즐겼다.
어제 내가 모래 위를 걸으며 깊은 발자국을 남겼었는데, 밤새 바람이 그 자국을 모두 덮어 다시 바다는 언제 내가 다녀갔었냐는듯 시치미를 떼고 매끄러운 백사장을 뽀얗게 드러냈다
바다의 모래가 어찌나 곱고 예쁜지...
손으로 만질 때마다 촉감이 참 좋았다.

 

 


  

바닷가에 특별히 마련된 벤치에 앉아 따뜻한 한낮의 태양을 받으며 여한없이 실컷 겨울바다를 즐겼다.

 돌아올 때는 하조대-동서울간 직행버스를 타고 싶었는데, 하루에 네대밖에 없는 버스를 바다에서
너무 오래 놀아 놓쳐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강릉까지 갔다가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하조대 바닷가는 너무 멋졌고, 내가 머문 숙소도 바로 코앞에 백사장을 펼쳐져 있어 매우 좋았지만
이번의 짧은 여행은 이상하리만큼 쓸쓸하고 안타까웠다.
하조대는 혼자 오기보다는 함께 즐길 수 있는 동행과 온다면 더욱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넓고 아름다운 바닷가를 마치 내것인양 1박2일동안 독차지하고 즐길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다음번 찾을 때에는 이번과 같이 쓸쓸함을 벗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Tip. 하조대 여행

1. 동서울-하조대간 직행버스 이용
  : 동해고속, 하루에 네 대밖에 없음. 버스비 16,000원 가량.
* 직행을 놓치면, 강릉이나 속초 등에서 연계하여 이동.

2. 숙소는 '알프스 비치모텔' 강력 추천 www.aplsbeach.com
 : 다른 곳도 모두 바다에서 가깝지만, 정말 이곳은 가장
바다에 맞닿아 있으며, 숙소에서 온전히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돈을 10,000원 더 내더라도 바닷가쪽 숙소를 잡도록 권장.

3.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하조대'와 '무인등대'

4. 식료품은 미리 사갈 필요 없음. 편의점이나 상가가 많고, 버스정류장 부근에 농협 하나로마트가 정가에 제품을 판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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