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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4 인간 연습

인간 연습


인간 연습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조정래 (실천문학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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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송환'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비전향 장기수.
어쩐지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그 이름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들이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시쳇말로는 '빨갱이들', 다른 말로는 '남파 간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한에서 활동하다 잡혀 감옥살이를 하며 평생을 살던 간첩들 중에서 끝끝내 전향을 하지 않은
그들은 남북 관계가 평화를 향해 치닫기 시작하던 즈음에 드디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얼굴을 보면 그저 이웃집 할아버지같은데, 끝끝내 사회주의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낭비하는듯 보이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내심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비록 감옥 안에서라지만 남한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았고, 남한 정부의 호의로 돌아가게 된
그들이 희희낙락하여 떠나는 모습하며 북한에 도착한 그들이 신념을 굽히지 않은 영웅으로
대접받아 또다시 북한의 정치공작에 이용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복잡하였던 것 같다.
물론 그에 앞서 타국에 의해 갈라져있는 현재의 실정이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오늘 읽은 '인간 연습'은 그 때 그 영화에서 본 이들과 같은 이른바 '빨갱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은 송환에서의 이들이 전향을 하지 않아 결국 영웅으로서 북한에 돌아가는
이른바 해피엔딩을 가진 것과는 달리 남한에서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전향을 하여 남한에서는
'빨갱이'로 찍히고,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버린 '전향 장기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신념 하나만을 무기로 하여 가족도, 자신도 버린 채
삶을 지탱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참 딱했다. 그들의 잘못이라면 무얼까. 지나치게 순수했고,
지나치게 곧았달까. 그러나 그들이 감옥에서 때묻지 않은 신념을 고이 간직하는 동안, 세상은
변하였고 지나치게 손을 탔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바였다. 처음에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었던
것이 전쟁을 통하고, 비방을 통하고, 서로의 안전을 위협하는 동안 이미 사상을 넘어서 감정의
문제가 되었고 그 와중에 처음에 품었던 이데올로기나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책에서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화합이라던가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좀 더 개인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대신
한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책의 주인공 윤혁이 결국 삶을 되찾은 것은 이미 무너져버린 자신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현재까지 굳건한 상대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
사람이 다름 아니었다. 집 없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과 살갗을 마주대고, 식사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면서 비로소 무수한 세월 동안 찾아왔던 삶을 되찾은 것이다.

책의 제목은 '인간 연습'이다. 비슷한 제목의 책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 있다.
어쩐지 나는 제목에 '인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에 흥미가 생기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내 제1의 관심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한 번 뿐이며, 흘러가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삶에는 연습이 없다. 인간이란 리허설없이 계속해서 실전과 맞부딪혀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윤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이를 먹고서도 간직하는 신념은 오래 산 이들의 아집과 다르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회의하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려 애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차츰차츰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런지...
'46개의 염색체를 가졌다고 해서 인간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되려면 인간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윤혁이 바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굽히지 않는 신념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를 포함한 -비전향이든 전향이든-장기수들의
기록된 삶은 모두 연습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실전의 기회를 갖도록 할 수는 없는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는 그리 성숙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념을 지킨
숭고함은 높이 사지만, 보다 평화로운 시기에 다시 태어나 신념도 지키고, 일신의 평화도 기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더불어 나의 현재 삶도 연습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은 왠지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나는 흘러가는 빠른 시간을 한탄하고, 끊임없이 과거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지만 살아왔던 삶을
모조리 연습으로 치고, 다시 실전을 겪는다는 것은 어쩐지 끔찍한 일이었다. 

인간이란... 삶이란 어쩌면 연습이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이나 발표와는 달리 삶이란 다소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라도 가치가 결코 덜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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